나의 유학시절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선천적인 호기심에서 조금은 즉흥적으로 시작된 것이 나의 유학생활이었다. 그때 나는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하여 건축학으로 학사학위를 받았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도시계획학으로 석사논문을 준비할 단계에 와 있었는데 갑자기 유학을 결정하니까 친구들이며 교수님들은 조금은 의아함을 보이고 있었다. 그때만해도 그 분야에서 그 정도의 학위면 어지간한 대학에 자리를 잡을 수 있을 때였고 유학을 가더라도 유명대학의 박사과정으로의 진입이 어렵지 않을 때였는데, 석사학위를 끝내지도 않고 그때만해도 한국에 잘 알려지지도 못한 Iowa State University로의 유학을 감행한 것이었다.  

  아이오와에서의 몇 학기는 무척이나 어려웠었다. 좋은 추천서와 강한 자부심의 나였는데…범위가 주어진 시험이야 달달 외워서 두서의 성적을 낼 수도 있었지만 토론으로 연속된 과목들을 이수하기는 정말로 힘이 들었다. 지금은 일종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버렸지만 그때는 정말 A냐 B냐 아니면 F냐 심각해서 스트레스에 잠을 잘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다행히 몇몇 신앙좋은 친구들도 사귀게 되고 생활에 적응도 하게 되어 차차 안정되게 학교 생활을 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수업시간은 아직도 어려웠지만 방과후에는 미국친구들과 같이 운동도 하고 성경공부도 했으며 밤에는 커뮤니티칼리지에서 아주 쉬운 영어 회화를 배우기도 하는 등 나름대로는 무척이나 노력을 했었다. 나는 그때 그곳에서 한참 어린 학부생과 결혼을 했기에 남들의 시선도 받았지만, 같이 공부도 하고 교회도 가며 서로 의지하게 되니 생활이 좀더 안정 되었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유학생들은 더구나 학비가 저렴한 아이오와에 오는 우리 유학생들은 돈도 없었고 순진하기도 했었다. 낡은 500불자리 승용차에 한달 3~400불로 집세, 식료품, 수돗세, 전기세, 전화세를 지불하며 생활했었다. 하지만 주말에는 여럿이 근교의 공원으로 호숫가로 놀러도 가고 고기도 구워 먹고 그런대로 낭만을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이오아주에는 크고 작은 호수들도 많아서 학교에서 빌린 카누를 차 지붕에 얹고 호수나 강을 찾아 가기도 했었고 때로는 모터보트를 빌려서 흰 물살을 가르기도 했었다. 반나절에 한자넘는 잉어며 메기를 수십마리씩 잡기도 하던 낚시질은 우리 유학생들의 취미꺼리도 되었지만 잉어는 소금을 뿌리고 꾸덕꾸덕 말려서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가 조기처럼 튀기고 구워 먹기도 했었고 메기는 매운탕감으로 제격이었다.  

  이런 생활 속에서 마침내 도시 및 지역계획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게 되었고 성적우수로 Honor Society인 타우시그마델타의 평생 멤버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곧 바로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서 도시 및 지역계획학으로 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박사과정은 과목들이 좀더 어려워졌고 교수들도 학생들의 학습 행태를 낱낱이 살피고 있어서 첫 1년은 적응에 힘이 들었다. 이때 첫 아이를 낳아서 기르고 있었기에 아무것도 모르면서 애를 키우자니 애가 한밤중에 울어도 그냥 떼를 쓰는건지 어디가 아픈건지 알 수도 없었으니 도와줄 이 없는 그 낯선곳에서 너무나 어려웠었다. 생활비에 공부에 울음과 기도로 1년쯤 지나니 대도시의 생활도 차차 익숙해지고 박사과정의 어려움도 차차 극복되어서 여러 시험들을 별 어려움 없이 패스해 나갔고 여러가지 인턴쉽, 강의조교, 연구조교도 졸업때까지 꾸준히 이어져서 실무경험과 생활비에 많은 보탬이 되었다.

  박사과정중의 경험중 한가지 생각나는 것은 로스앤젤리스 남부 흑인 지역에서의 반년에 걸친 인턴쉽이다.  대학신문 광고를 보고 찾아간 곳이 위험하기로 유명한 South Central Los Angeles의 Neighborhood Housing Services라는 기관이었다. 직원들은 모두 흑인인데 내가 무언가 색달라 보였는지 도시계획인턴으로 채용이 되었고 방과후 부리나케 차를 몰아 달려가서는 그 지역 개발계획도 세우고 흑인애들 두명을 조수로 하여 그 지역의 주택조사, 상업지역 조사 등을 두루 행하였다. 어떤때는 젖먹이를 가진 집사람을 대동하고 그 지역 상가 문들을 모조리 두드리기도 하였는데, 나중에 이러한 것을 안 미국교수들이며 한국학생들이 너무나 놀라워 했다. 낮에도 총알이 핑핑 날아오는 곳을 어떻게 그렇게 누비고 다니느냐 총을 맞지는 않았느냐는 걱정어린 놀라움들이었다.
  
  1989년 봄 드디어 박사논문을 끝내게 되었다. 평소에 교수들은 내 글들에 창의성이 엿보인다 칭찬들을 했고 영어도 학부생들의 인문과목 강의조교를 맡을 수 있을 만큼 향상이 되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아쉬움과 컴플렉스도 있었으니 그것은 대학 다닐 때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지 못 했다. 건축학이며 경제학책들을 충분히 독파하지 못했다는데서 오는 것들이었다. 학부때 이러한 과목들을 좀더 열심히 공부 했더라면 후에 고생을 덜 했을 것도 같고 같은 고생을 했더라도 좀더 차원 높은 공부에 몰두 할 수 있었을텐데… 박사학위를 끝낸 후 여러가지 가능성속에서 우선은 미국에서 도시계획가로서의 실무경력을 쌓기로 결론을 내렸고 공채를 거쳐서 취직한 곳이 로스앤젤리스 시정부 도시계획국이었다. 여기서 부도시계획관으로 일을 하다가 승진시험을 거쳐 주택계획 및 경제분석관으로 임용된 곳이 주택국이었다. 여기에서 미국 대도시의 산적한 도시.주택문제들을 직접 겪으면서 수 많은 정책기획과정에 참여를 했고 폭동과 지진을 겪으면서 그 복구작업의 와중에 휩싸였었다. 한국으로의 귀국은 식구며 직장 동료들에게 의아함을 줄만큼 조금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는데 임지는 물론 한동대학교이었고 도미 14년만인 1995년 8월이었다. 혼자서 떠난 길이 처와 두 아이를 거느린 가장으로서의 귀국이었고, 20대 후반의 나이에 떠나서 40대 초반의 나이로 고향에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지금 창밖으로는 늦가을의 비가 뿌리고있다. 이어지는 추억들과 여러분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쉬움 속에서 장도를 축복해 주시던 서울대학교의 윤교수님, 지금도 내 이야기를 하신다는 ISU의 Dr. Shinn, 박사과정을 지도해 주시던 USC의 Dr. Baer, 어정쩡하기만 하던 나를 성심껏 이끌어 주셨던 아이오와교회의 노목사님, 로스앤젤리스교회의 오목사님, 그리고 지금은 천국에서 나를 내려다보실 장모님이신 권목사님, 이 모든 분들에게 나는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고 빚을 지고 있다. 이제 나의 몫은 하나님의 대학인 이 한동에 있다고 믿는다. 이 한동대학교가 미래를 향한 세계를 향한 꿈을 구체적으로 실현해 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싶고 미력이나마 힘을 합하고 싶다. 이것이 나의 조그만 소망인 것이다. (끝)  

한동신문, 1996,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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