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한인사회의 역사 (1)

해외 한인사회의 역사 (1)

구 자 문 한동대 교수
미국에 와서 몇주 지내며 한인타운에도 가보고 연로하신 재미동포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어보며, 이들의 초기 정착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다시금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다. 근래 글로벌 경제불황으로 예전 보다는 국내외에 다소 어렵게들 지내고 있는 상황이지만 100여년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6.25전쟁 이후 폐허에서 모두가 시달릴 때, 해외에 나와 있는 동포들의 처지는 지금에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힘들었을 것으로 본다. 전통적인 인종차별, 이름 없는 가난한 나라 출신, 여기에 영어까지 서툰 동포들이 제대로 자리 잡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와중에도 열심히 일하고 아이들을 교육시켜 지금의 한인커뮤니티를 이루게 되었다. 물론 그동안 크게 성장한 우리나라의 경제산업도 성공의 큰 배경이 되었다고 본다. 물론 아직도 우리 동포들은 음으로 양으로 차별만이 아니라 질투를 받고 있어 어려움이 크기는 하지만, 과거의 어려움과는 크게 다른 어려움이라고 본다.  

미주 한인교회사를 펼쳐보니 1900년대 초기 하와이 사탕수수밭에 근로자로 이민했던 한인 동포들의 눈물겨운 삶과 그 극복과정으로부터 페이지가 시작되고 있었다. 1903년 1월 2일 한국인 102명이 미국 증기선 갤릭호를 타고 제물포항을 떠났고 10일후 하와이에 도착했다. 일제의 경제 침탈과 흉년, ‘하와이에는 나무에 돈이 걸려 있다’는 소문을 듣고 지원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이를 시작으로 7천 400명이 1905년 6월 말까지 계약을 맺고 하와이의 30여개 사탕수수농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새벽 4~5시에 일어나 하루 10시간 이상 사탕수수밭에서 고된 작업을 하며, 감독관에게 채찍질을 당하며,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는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1910년 대한인국민회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하와이에 남아 있는 한인은 4천 187명인데, 107명의 아이들이 태어났으며, 2천여명이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임금은 남성 월 17달러 내외, 여성 10달러 미만 수준이었고, 농장에서 제공하는 열악한 환경의 캠프에서 거주했다. 그러나 교회 중심의 공동체 형성 및 독립운동 자금 마련 등 비교적 체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었고, 계약이 끝난후 본토로 이주하거나 현지에 정착하여 한인사회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1905년 5월에는 1,033명의 한인들이 \’애니깽(HeNeQuen)\’이라 불리는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에네켄 농장으로 이주했다. 고액 연봉의 계약 노동을 기대했으나, 실제로는 가시 돋친 선인장을 수확하며 4년간 강제 노동에 시달렸으며, 계약이 끝난 후에도 귀환하지 못했다. 사실상 노예와 같은 부당한 계약 조건으로 인해 이동의 자유가 없었는데, 브로커에 의한 감언이설과 속임수로 이주한 경우가 많았고, 지속적으로 고립되어 현지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고, 정치경제적으로 혼란했던 멕시코에서 역시 애니깽으로 불리는 한국계 멕시코인의 시초가 되었다. 미국과 멕시코 두 이주 모두 대한제국 말기 흉년과 경제적 빈곤 속에서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난 이민이었으나, 하와이는 상대적으로 체계적인 노동 환경과 민족교육/독립운동이 가능했던 반면, 멕시코는 극심한 착취 속에서 고립된 삶을 살았다는 차이점이 있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일제통치 시기에 토지와 생산수단을 빼앗긴 농민과 노동자들이 만주와 일본으로 이주하였다. 이 시기에는 정치적 난민들과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러시아, 미국 등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일본은 1931년의 만주사변과 1932년의 만주국 건설을 계기로 만주지역의 개발을 목적으로 한인들의 대규모 집단이주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1930년대 후반 만주지역의 한인인구는 약 50만 명 정도로 증가했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경제호황을 맞아 다수의 한인들이 노동자 신분으로 도일했으며, 1937년의 중일전쟁과 1941년의 태평양전쟁을 계기로 대규모의 한인들이 광산과 전쟁터로 끌려갔다. 이런 식으로 재일한인의 규모는 급속히 증가해서 일본이 미국에게 패한 1945년 8월에는 230만 명 정도에 이르렀었다.

1962년에 한국정부는 남미/서유럽/중동/북미로 집단이민과 계약이민을 시작했다. 이민정책의 근본 목적은 잉여인구를 외국으로 내보내 인구압력을 줄이고 해외에서 일하고 사는 교포들이 송금하는 외화를 벌기 위한 것이었다. 최초의 집단이민은 1963년 브라질로 103명의 농업 이민자들이 출발한 것을 시작으로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볼리비아 등으로 농장 개간을 명목으로 1,300명에 이르는 이들이 초청이민을 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농업 경험이 없었고 황무지 개간이 힘들어서 대부분 대도시로 이주하여 상업에 종사하였다. 독일로는 1963~1977년 사이 7,936명의 광부들이, 1960~1976년 사이 11,057명의 간호요원들이 파견되었다. 유럽한인동포사회는 이들을 중심으로 유학생, 주재원 등이 더해져 형성되었다.

북미로의 이주는 북서구 유럽계 이민자들만을 선호하던 이민법이 1960년대 중반에 개정되어 이민 문호가 한인에게도 열리자 본격적으로 이주가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화이트 칼라직에 종사했던 중산층이 1960년대 중반 이후의 미국과 캐나다 이주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03~1905년의 하와이 노동 이민, 1965년 이전에는 소수의 유학생, 결혼 이민 등이었는데, 1970~1980년대에는 가족 이민과 기술 이민의 폭발적 증가로 수십만 명이 이민하였다. 2000년대 이후에도 연간 약 1만~2만 명 수준의 영주권 취득이 유지되고 있는데, 2024년 말 기준 미국 내 전체 한인 인구(혼혈 포함)는 약 206만 명~221만 명으로 조사되었다. 현재 미국 내 6번째로 많은 이민자 그룹이다. 1세대는 약 110만 명이며, 미국 태생(2세 이상)도 비슷한 수준인 110만 명으로 50%를 차지하고 있다.

영남경제 2026년 4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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