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과 지역사회 관련 토의

대학과 지역사회 관련 토의

구 자 문 한동대 교수
  전통적인 대학의 역할은 지식의 보존과 재생산을 위해 존재해 왔다고 본다. 이는 1) 지식의 보존과 탐구: 고전적 의미의 대학은 진리 탐구와 학문 그 자체가 목적이었으므로, 실용성보다는 학문적 자율성, 비판적 사고, 철학·과학·인문학의 축적이 핵심이었다. 2) 엘리트 양성: 국가 관료, 법조인, 성직자, 의사 등 사회 핵심 인력 양성을 통해 사회질서를 유지·재생산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3) 사회로부터 ‘거리’ 유지: 중세·근대 대학은 의도적으로 지역경제나 정치로부터 일정 거리를 두었는데, 이를 통해 학문의 독립성과 비판기능을 보장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후, 특히 대중고등교육이 확산되면서 대학의 성격이 크게 변했다. 대학은 ‘고립된 섬’에서 ‘지역 성장의 엔진’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 특징은 1) 지역 인재 양성과 정착: 대학은 더 이상 소수 엘리트만의 공간이 아니라, 지역 청년을 교육하고 지역에 남게 하는 장치가 되었다. 2) 지역 경제와 결합: 대학은 산학협력, 기술이전, 창업지원, 평생교육 등을 행할 뿐만 아니라 대학병원, 문화시설 등은 지역 인프라를 제공하고, 많은 물품을 구매하고 많은 지역인들을 고용하는 등의 역할을 하고 있다. 3) 문제 해결 플랫폼: 대학은 연구자·학생·지자체·시민들이 만나 고령화, 환경보전, 도시개발, 사회복지, 지역문화 보존 등에 있어서의 문제 해결을 위한 중간 매개자 역할을 한다. 이 단계에서 대학은 지역사회에 뿌리내린 공공기관이자 지식 허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경쟁력 있는 대학은 포항과 같은 지역사회가 글로벌화된 테크노폴리스로의 변신을 추진하는데 그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1) 대학은 테크노폴리스의 ‘핵’: 경쟁력 있는 테크노폴리스에는 예외 없이 세계적 연구중심대학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연구소, 스타트업, 글로벌 기업 R&D 센터가 밀집하게 된다. 대학은 인재를 끌어오고, 기술을 개발하고,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중력장(Gravity Well) 역할을 한다. 2) 교육기관은 혁신 플랫폼: 현대의 대학의 역할은 더 이상 ‘가르치는 곳’에 머물지 않고, 기초연구뿐만 아니라 응용연구, 창업 인큐베이션 등으로 시도되는 학문과 실제간 융합의 장이다. 3) 글로벌 네트워크의 관문: 경쟁력 있는 대학은 지역을 세계와 직접 연결한다. 대학은 국제 공동연구, 글로벌 인재 유입, 다국적 기업과의 협업, 국제 표준·담론 형성 등에 참여한다. 이때 대학은 지역을 대표하는 지적 브랜드로서 지역이 세계 시장에 진입하는 관문(Gateway)이 된다. 4) 지역에 ‘붙잡히지 않는’ 것이 오히려 경쟁력: 이는 흥미로운 역설인데, 좋은 대학은 지역에 봉사하지만, 지역에 종속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지역의 정치·단기성과·로컬 이해관계 등에 휘둘리면 대학은 글로벌 경쟁력을 잃는다. 그래서 경쟁력 있는 테크노폴리스는 대학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대학들은 역사가 일천하고, 졸업장을 남발하며, 전통적인 대학의 역할의 틀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근래 ‘글로벌 혁신대학’으로의 진화를 요구받고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이는 누구 하나의 잘못이라기보다 정부/대학/국민들 모두의 책임이기도 하다. 그 문제점들은 1) 국가 주도·평가 중심 구조: 재정, 정원, 학과, 평가 지표 대부분이 중앙정부 기준에 의해 결정. 대학의 전략이 ‘장기 연구·위험한 실험’이 아니라 단기 성과 + 평가 대응으로 수렴함이다. 그리하여 대학에서 필수적으로 진행해야 할 실패 가능성 높은 연구, 수익 안 나는 기초연구, 학제 간 실험 등을 진행하지 못하게 된다. 2) 산학협력이 기업의 외주 연구소 역할에 머뭄: 지역산업과의 관계가 ‘협력’이 아니라 ‘하청’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3) 지역과의 관계 ‘정치화’: 지자체/지역의 요구가 원초적이고 장기적인 대학 기능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기적/표피적 혹은 지극히 지역적인 성과만을 바라는 경우가 많다. 4) 인재의 수도권/해외 유출: 졸업생들이 지역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나며, 우수 인재 지역영입도 미미하다.  

  실리콘밸리의 스탠포드는 ‘대학’이면서도 ‘지역 생태계 설계자이며 원동력’이었다.’ 교수의 창업을 허용하고, 연구 성과의 민간 이전을 적극 허용했고, 실패한 스타트업 경험도 커리어로 인정했다. 보스턴과 케임브리지의 MIT와 하버드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초과학 허브이자 바이오·AI·로보틱스 클러스터를 형성했는데, 이들은 ‘지역 발전’을 목표로 하지 않았고, 경쟁력을 갖추다 보니 지역이 따라 성장한 구조였다. 영국 케임브리지는 작은 도시 + 세계적 학문이 존재하는 ‘Cambridge Phenomenon’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대학, 연구소, 스타트업, 투자자 간 공식/비공식 네트워크를 통해 아이디어가 이동한다. 대학은 지식을 생산하면서도 사람과 아이디어가 섞이는 장인 것이다.  

  모든 대학이 ‘종합대학·연구중심대학’일 필요는 없으며, 각 대학이 글로벌 네트워크에서 맡을 역할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대학은 기본적인 교육/연구뿐만 아니라 특정 분야의 테스트베드, 지역 특화 산업의 R&D 허브, 국제 공동연구의 중간 노드, 실험적 교육 모델의 실증 공간 등이어야 한다. 또한 각 대학 졸업생들은 각자 학력과 경력에 따라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첨단 R&D 내지 고경력의 매니지먼트, 다음 층의 우수 기술자 및 중간 매니지먼트, 그리고 그 아래층의 기술직/기능직 등에 자연스럽게 그 네트워크에 진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엄밀히 대학은 지역을 살리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으나, 좋은 대학이 존재하는 지역은 경쟁력을 갖추게 되고 장기적으로 살아남게 된다.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진 중간규모 도시에 위치해 지정학적인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포항은 우수한 대학들을 지녀 국내 어느 도시들과도 차별화되고 있다. 국내 제일의 R&D 경쟁력을 지닌 포스텍, 글로벌 현장인력과 법률가/개발전문가/엔지니어를 키워내는 한동대, 그리고 여러 전문대학들이 존재하고 있어 포항의 장래를 밝게 하고 있다고 본다.  

영남경제 2026년 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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