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1920년대생 조부모님 부모님 세대를 기억하며 (하)
구 자 문 한동대 교수
지난번 언급한 1905년생 백부님의 사진은 전신만 남기고 가위로 오려진 한 장뿐이었는데, 키도 크시고, 밝은 얼굴에 안경을 쓰시고, 멋진 양복에 넥타이를 매신 인테리의 모습이었는데, 30세도 되시기 전 왜 돌아가셨는지 누구도 잘 설명해 주시지 않았다. 독립운동을 하신건지, 사회주의 운동을 하신건지, 혹은 병에 걸려 돌아가신건지? 그렇다면 왜 제대로된 사진 한장 남아 있지 않을까? 부친께서도 필자가 다 성장했을 무렵 쯤 지나가는 말투로 ‘형님만 살아계셨어도…’ 하며 아쉬움을 토로하시던 기억이 난다.
이제 장남이 되신 1911년생 백부님은 농사를 지으시며 부모님을 모시고 집안을 지켰는데 슬하에 5남 1녀를 두셨다. 조부께서는 평생 농사일을 직접 하신 것 같지 않았지만, 이분만은 어려운 살림에 작은 농사라도 짓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본다. 백부님의 자식들은 다 장성하고 결혼하여 자식을 한둘씩 두었고 손자손녀들도 이미 장년이 되었다. 장남은 농촌지도직 공무원을 퇴직하고 이미 80대 중반 나이가 되어 대전에 살고 있는데, 80세가 된 차남은 고향에 살면서 문구/복사기 등을 도소매하며 50여년 가게를 운영하면서 재정적으로도 여유가 생겼는데, 이분이 호적상으로는 작고한 1905년생 백부님의 자식으로 입적되어 우리 집안을 대표하고 있다.
필자의 부친께서는 소학교 졸업 후 서울로가 일본인 회사에 다니셨는데, 호남인데다 일본어를 잘하고 일을 잘해서 사장이 일본 본사로 데려가려 했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하지만 부친께서는 일제 말 징용을 피하기 위해 공주군청에 취직하여 미군 폭격기 감시 망루지기를 하셨다. 그런데 그때 같은 나이에 전문학교를 나오신 외삼촌께서 역시 징용을 피해 같은 곳에 취직해 계셨고, 부친의 사람됨을 보시고 하나 뿐인 여동생과 결혼시켜야겠다고 마음을 먹으신 것 같다. 그때 말단 공무원으로 계시면서 부친께서는 그렇게 결혼도 하시었고, 고등문관시험에 뜻을 두셨는데 해방이 된 것이다. 그 후로도 부친께서는 군 서기로 일하시며 고등고시를 준비하시기도 하셨는데, 6.25가 터진 것이다. 부친보다 2살 어린 숙부님은 소학교 졸업 후 만주에서 이일 저일하시다가 해방 후 서울에 자리를 잡았는데, 결혼 후 첫애(필자의 사촌형)가 생후 한달도 않되어 6.25가 터져 애를 안고 고향인 충남 보령까지 걸어서 피난 오다 보니 애 뒷머리가 옴폭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막내 숙부님은 사범학교를 나오시고 모 대학 법학과 1학년에 입학하셨는데, 그해 6.25가 터져 역시 고향으로 피난을 가는데, 비행기 폭격을 만나 타던 자전거를 버리고 옆 도랑으로 엎드렸고 자전거는 폭탄에 박살이 났다.
막내 숙부님이 몇 달 차이로 군대를 가지 않은 만큼, 위로 3형제들도 나이가 들어 6.25 참전 용사가 되지는 못했다. 모두들 고향에 숨어 지내며 공산치하의 몇 달을 견디어 냈는데, 필자의 고향인 충남 보령은 바닷가로서 1950년대 중후반에서 1960년대에도 간첩들이 자주 침투하던 곳이었지만, 6.25전후에도 사상논쟁이 치열했고, 많은 이들이 희생된 곳이다. 1950년 여름에도 보령경찰서를 점령한 인민군들이 뒤편 창고에 많은 양민들을 가두어 놓고 있었고, 후퇴하며 모두 총살시킬 계획이었다는데, 전날 밤 13세 어린애가 몰래 가서 열쇄를 부셔 열어 모두 다 도망쳐 살아난 것이다. 하지만 보령군 주변의 다른 군에서는 수많은 인사들이 총살되는 피해를 보게 된 것이다. 그때 그 아이는 필자 부친의 소학교 동기인 이모씨의 동생으로 물론 뒤에서 형들의 코치가 있었겠지만 대단한 일을 한 것이다. 이 집안은 오래전부터 방앗간, 술도가, 사기그릇공장 등을 운영했고 그 후에는 극장사업, 권투체육관 등을 운영했는데, 2000년대에 더 어린 동생 한 분이 그 지역 시장에 선출되기도 했었다. 필자의 부모님께서도 그 집안 형제자매들과도 친하게 지냈는데, 그집 장손이 필자의 국민학교 동기이다. 그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해군에 입대했고, 그후 화물선 선원으로 세계를 돌아다니다가 고향에 정착했는데, 지금 고급 중식당을 운영하고 있고 어쩌다 고향에 가면 만나기도 한다.
보령지역은 제주도나 지리산처럼 사상논쟁에 크게 휘말리고 큰 피해를 입은 곳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바닷가라서 북한 간첩들이 수없이 드나들었던 탓인지, 사상논쟁에 많은 집안들이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촌형 또래인 고 이문구 선생의 고향이 이곳이고 그가 쓴 ‘관촌일기’가 필자가 어릴 때 살았던 동네의 6.25 전후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고 ‘만다라’를 쓴 김성동 작가가 보령시 대천동에서 4km 떨어진 청라저수지 위쪽 청라면 장산리 출신으로 6.25때 사상논쟁으로 부모님들이 억울하게 죽었음을 밝히고 있다. 물론 이분들 말고도 이러한 와중에 어렸기에 혼자 살아남아 미국으로 입양되어 공학박사가 된 분도 있다. 이곳이 필자의 본적지이기도 한 것이다. 청라저수지는 차령산맥 끝부분 해발 680m의 성주산 기슭에 위치하며 저수량이 매우 큰 곳인데, 1960년경 완공되어 필자의 본적지는 지금 물에 잠겨있다. 어릴 때 부친을 따라 침수되기 전 조부님댁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아장아장 걸어가며 물레방아도 보고, 뒷산의 밤나무도 보고, 주변의 농가마을들을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모두가 물에 잠기고 그 위쪽 산등성이에 필자의 고조부, 조부, 그리고 부친 형제들의 묘소가 있다. 이분들은 우리나라 근세의 격동의 세월을 모두 겪어가며, 식구들을 먹여 살리며 직간접적이나마 조국 건설에 앞장서다가, 잘살게 된 조국의 삶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다. 물론 필자의 모친은 100세를 넘어 장수하고 계시며, 70대 중반의 형님 부부가 모시고 있는데, 오래 더욱 건강하시기를 빌 뿐이다.
대경일보 2025년 8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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