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1920년대생 조부모님 부모님 세대를 기억하며 (상)

1880~1920년대생 조부모님 부모님 세대를 기억하며 (상)

구 자 문 한동대 교수
  세월이 유수(流水) 같다는 것은 세월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아도 갑자기 10~20년이 지나고, 60년 혹은 그 이상이 지나버림을 비유하는 것이다. 필자의 기억에는 흰 수염 기르시고, 둥근 안경 쓰시고, 지팡이 짚고 천천히 장에 다녀오시던 호인풍모(好人風貌)의 할아버지 모습과 어두운 방에서 두런두런 말씀하시며 모시/청올치 삼으시던 할머니 모습이 어제 같이 생각난다. 이때는 필자의 유년시절이던 1960년대 초중반이었다. 필자는 1960년도 달력을 보던 내 모습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가 아마 4.19 학생혁명 직후로서 학교 운동장에서는 마이크를 통해 ‘학도들은 용감하다~ 거룩한 피를 흘려~’ 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얼마 후에 5.16혁명이 일어나고 ‘재건(再建)’ 외치던 구호가 생각난다. 그때 ‘명랑한 새아침에 태양도 밝다…. 재건~재건 만나면 인사~’하던 노래도 생각난다.

  남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정도의 영아기 기억을 지니고 있는 필자이지만, 대부분 단편적인 기억들일 뿐이나, 만 5~6세 때의 기억은 대부분 스토리로 잘 엮어져 있다. 그 당시 어른들로서는 일제가 망하고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었으며, 몇 년후 북괴의 남침으로 6.25가 일어나고 모든 게 파괴되었던 일들이 바로 엊그제 같이 기억되는, 아직도 전쟁의 상처가 크게 남아 있던 시기였다.  우리 할아버지는 1887년, 할머니는 1885년에 태어나셨고 16~18세때 결혼을 하셨는데, 이때가 1902~3년 정도로 아주 오래전 일이다. 그 이후 1905년 장손이 태어나고 고모님이 1908년 정도 태어나고 차남이 1911년, 그리고 필자의 부친 3남이 2021년에 태어났다. 그후 4남이 1923년, 그리고 막내인 5남이 1928년 태어났다. 둘째와 셋째 사이에 간격이 큰 것은 그간에 할아버지께서 집을 떠나 방랑하셨다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마 나라를 잃고 울분에 김삿갓처럼 방랑을 하신건지… 그 당시에 그런 분들이 많았다고 듣기는 했다. 이제 모두 다 돌아가셔서 진실을 알 수가 없음이 안타까운 것이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이러한 글이라도 남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1980년대 필자가 미국에 유학할 때, 재학 중인 대학에 동양학 도서관이 있어 그곳에 가 공부도 하고 심심할 때 이것저것 옛자료들을 찾아보곤 했었는데, 일본 자료들 중 일제 강점기는 말할 것도 없지만 1850~90년대 자료들도 많이 있었다. 일본어를 잘 모르기에 제목만 읽어 내리다가 내용이 궁금하면 일본어를 아는 분들에게 내용을 묻기도 했었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조선은 대가 끊어질 정도로 쇠약해진 왕권과 세도정치, 당파싸움, 쇄국정책, 천주교 탄압 등으로 특징지어지며, 세상변화를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였고, 주변 열강에 시달리는 약소국 신세였다. 하지만 일본은 1854년 항구를 개방하고, 서구문명을 받아들이며, 대포, 군함 등 신식무기를 갖추어 가면서 조선정벌을 논하고 있었다. 그때 무예와 학문을 모두 갖춘 사무라이(侍, さむらい)들은 신식 공무원으로 그 나라의 중추가 되어 군국주의의 탐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20세기 초에 우리 민족은 강압에 의한 한일합병을 겪으며, 많은 동포들이 투옥되고, 죽임을 당하고, 살길 찾아 만주/연해주 등지로 떠났다.

  연합국의 2차대전 승리로 1945년 우리민족이 해방이 될 때, 조부모님께서는 환갑을 넘고 계셨고, 6.25 등을 모두 겪으시고 좀 안정이 된 1960년대에는 70~80세에 이르는 연세가 되셨다. 그 어려운 세월을 지나셨음에도 조부께서는 밝고 온화하신 모습으로 모두들 좋아했다. 간혹 ‘춘풍샌님’이라는 말도 들으셨는데, 그 말인즉슨 사람 좋고, 세상 물정 모르고, 모든 것을 좋게 해석하며, 남에게 나쁜 소리 못하는, 좀 우유부단한 선비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기질이 부친을 거쳐 필자에게도 전해져 내려 오는게 아닌가 싶다. 조부모님은 83~88세로 장수하셨는데, 두분 모두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작고하셨다. 조부모님으로부터 간간이 듣던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어릴 때 전쟁이 나 많은 이들이 총과 화살에 맞아 죽고, 집이 불타는 등 너무 무서웠다’는데, 청일전쟁 즈음이 아니었나 싶다. 지방의 부유한 우리 집안이 ‘정부군의 공격으로 어려움을 당하여 집이 불타고 연못이 다 파헤쳐졌다’ 등의 이야기는 좀 전설 같기는 하나 조선조 언젠가 핍박을 당하던 때 이야기 같기도 하다.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를 지나며 문무반 출세자가 많았던 우리 집안이 영·정조때 쯤에 ‘벼슬하지 말아라’는 선조의 유언이 있었고, 그 유언을 따르다 보니 가난한 시골 양반으로 남게 되었다는데, 요즈음 생각하면 역사상의 사건들과 좀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기도 하다.  

  필자의 부친과 모친이 결혼한 것은 1945년 해방되기 몇 달 전이었고 그때 부친은 24세, 모친은 20세였다. 우리 친가보다 모친댁이 좀 더 부유한 편이었는데, 그 당시 어린 처녀들이 너무 일찍 시집을 가 고생하는 것을 많이 보셔서 외조부모께서는 외동딸을 그 당시로는 좀 늦은 20세에 결혼을 시키신 것이라고 들었다. 우리 친가는 증조부, 조부로 내려오며 집이 가난해지고, 더구나 조부께서는 방랑자셨다. 하지만 필자의 백부인 장손은 서울로 가 어려운 가운데도 고학하며 상업학교를 우수하게 졸업하시고 한국인 최초로 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에 입사하셨는데, 둘째 백부는 서당에서 글을 익히고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셨다. 필자의 부친인 셋째는 10살에 소학교에 입학하셨는데 성적이 매우 우수하여, 장손께서 이 셋째를 5학년 이후에 서울로 데려가 중학교에 진학시키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출세길로 잘 나가시던 장손께서 자손도 못 남긴채 1935년경에 서거하신 것이다.

대경일보 2025년 8월 10일


코멘트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