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날

무덥고 길던 여름이 끝나고 이제
가을이다.
한여름의 열기와 피로를 이겨낸 사람들이 다 대견해 보이고
왠지 연민같은 정다움과 따뜻한 시선으로 사람들을 보게되는 건
이 여름을 함께 무던하게 견디어 낸 동류의식인지…
어느새 고개를 숙인 벼이삭들이 보이듯
우리네 가슴 속에도 한 알 한 알 영글어가는 성숙함이 있을것이다.

가로수 잎새들 중에도
가을의 손길이 닿아 어루만진 잎새는 붉게 얼굴을 붉히고 있다.
이 나무, 저 나무들 사이로 가을은 붉은 붓을 들고
슬쩍 슬쩍 터치를 하고 지나간다.

어제는 부지런히 김밥을 만들고 물과 책과 돗자리를 가지고
근처 호수공원의 한적한 곳을 찾았다.
아침 산책때 미리 점찍어 둔 아주 적당한 장소,
사람들이 즐겨 찾는 호수공원 말고 아직은 은밀한 곳이 있다.

그 곳은 인공의 호수공원과는 다른, 호젓한 산길을 연상시키는 작은 공원이다.
상수리 나무들로 둘러싸인, 넓직한 그늘에 자리를 깔고
눕기도 하고 앉기도 하면서 책을 읽는다.
누워서 바라보는 하늘에는 높은 가지에 매달린 무성한 잎새들이 부드럽게 출렁이고
눈부시게 흰 구름이 지나간다.
귓가를 간지르며 지나는 상냥한 바람과 아직도 연녹색으로 이쁜 잔디밭과  기품있는 소나무와
사계절 어느 때나 아름다운 벚나무들.
어디론가 뻗어있는 나무들 도열한 아름다운 길이 내 눈 앞에 있다.
심호흡을 하며 기쁜 마음이 든다. 이것으로 충분히 행복하다는 느낌을 음미한다.

어느새 책 속에서 성큼 희랍인 조르바가 걸어나와
내 손을 잡고 춤을 춘다.
그가 연주하는 산토리를 듣는다. 그의 열정과 자유를  느낀다. 땀냄새 물씬 풍기는 그의 원시성
가득한 짐승을  느낀다.
너무 슬퍼서 춤을 추었다는 그를 나는 안다.
아주 익숙한 내 자신을 그 사람 조르바에게서 본다.
그러나 그가 그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충실할 때 나는 나를 참았다는 것이 다르다.
이것은 비겁인가?  모르겠다. 그러나  내 안의 원시의 나는
나를 벗어나기 위해 언제나 내 속에서 나를 걷어찼다.
어쩌다  나를 탈출해  미친듯한 춤을 추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붙잡혀 내 안에 갇히곤 한 그 여자는
이제는 잠잠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내가 이제는 화해하자 손을 내밀면 그녀는 내 손을 잡아줄까?
아직도 아닐것 같다.
그녀가 원하는 것을 나는 주지 않았으니까.
단순하고 격정적으로 원하는 것이 사실은 가장 어려운 것이었으므로…

가을이 오고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을과 겨울이 아직 설익은 풋풋함으로
내 앞에 놓여있다는 것.
한순간 한순간 만끽하며 사랑할 시간이 아직
내가 사용하지 않은 채 기다리고 있다는 것.
이것으로 충분히 근사하고 감사하고 행복하다.

이 곳 호수공원은 가을이 깊어감에 따라
점 점 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워 질 것이고
나는 나무들과 하늘과 바람에 취해
이 아름다움을 친구들과 나누고 싶은 갈망을 느낄 것이다.

언제나 어디서나 건강하고 행복하거라.내 아름답고 소중한 친구들이여!
저마나 아름다운 가을을 맞이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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