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의 고대유적

포항의 고대유적

구 자 문 한동대 교수
  얼마 전에 포항 호미반도 흥환리해변에서 발견된 사람발자국 화석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분명 사람의 발자국인데 길이가 320mm라서 지금이라면 키가 2m는 넘을 거인의 흔적같이 생각된다. 어쩌면 현생인류인 \’크로마뇽인\’이 아닌 좀 더 고대의 체격 우람한 \’네안데르탈인\’의 발자국일지도 모르겠다. 자갈이 상당히 크고 발자국이 선명한데, 보관하는 이는 이를 어찌할 바 몰라 오랫동안 보관해오고 있는데, 그 당시 흥환리해변에서 잠수작업을 하면서 돌칼 등 다수의 석기들도 건져내었다고 한다. 그 부근은 같은 성분과 색깔의 화성암 자갈들로 덮여 있는데, 좀 더 세월 가기 전에 조사연구를 해봐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곳 호미반도는 한반도 동남쪽 끝부분에 해당하여 수만년전부터 선조인류들이 동해안을 따라 무수히 내려오며 오랫동안 삶의 무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1~2만년 전만 해도 서해는 육지라서 중국대륙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동해는 지금과 큰 차이 없이 깊은 바다였다. 그 당시 선조인류들은 동해안에서 조개를 찾고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했을 것으로 본다. 뻘이 넓지 않아 대규모 조개껍질 패총이 발견되지 않는지는 모르나 이들의 흔적을 좀 더 면밀히 조사연구 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포항시 흥해읍 칠포2리 마을 뒤쪽의 곤륜산 계곡에는 암각화가 있다. 그 계곡의 암벽과 암반들 가운데 길이 3m, 높이 2m쯤 되는 한 바위 앞면, 위, 바닥 등에 사다리꼴형 문양 내지 장구모양 그림 등이 여럿 새겨져 있다. 칠포일대에는 이 암각화 외에도 알구멍이 새겨진 바위들도 있고 돌화살촉과 사람얼굴 모양을 새긴 바위들도 다수 있어 선사시대 인류의 예술과 의식행위를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이는 1989년 11월 포항지역 향토사연구모임인 고문화연구회에서 조사보고 했는데, 그림들이 어떤 내용인지 정확한 해석은 아직 없다고 한다. 2017년 1월에도 포항시 동해면 조항산 바위에서 암각화들이 발견되었는데, 이곳에 위치한 3개의 바위에서 발견된 것으로 칠포리 암각화들과 거의 비슷한 모습이다.  

  고인돌이 가장 많이 분포한 곳은 포항시 기계면 성계리, 인비리, 지가리, 내단리 등 일대로서 100여기가 넘는다. 성계리 고인돌들은 덮개돌의 무게가 200톤이 넘을 정도인데, 대부분 사람 사는 마을 안에 자리하고 있다. 왜 이곳에만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남아 있을까?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부족장의 무덤으로 알려졌지만, 이도 정확한 것이 아니라고 하며, 새겨진 그림들에 대한 해석도 아직 정확하지 못하다고 한다.

  고인돌의 분포지가 거의 범세계적인 것임과 아울러서 그 기능에 관해서도 많은 견해가 있다. 첫째는 무덤의 기능, 둘째는 제단(祭壇)의 기능, 셋째는 묘표석(墓標石)의 기능 등이다. 그런데 묘표석의 기능은 제단의 기능에 포함될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고인돌의 기능에 관한 견해로는 1910년 선교사로 온 언더우드(H. G. Underwood)는 지신(地神)에 대한 제사용으로 해석하고 있어 무덤과의 관련은 멀다고 주장하였고, 손진태(孫晉泰)와 대만의 능순성(凌純聲) 등이 무덤에 대한 제단이라고 주장하였고, 그 후에 많은 국내외 연구자들이 이 견해를 수용하였다.

  또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포항시 신광면 냉수리 유적에 관한 것이다. 지금까지이고 냉수리에는 7~8기 정도의 대형 고분이 발굴되었는데, 대개 서기 7~8세기경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냉수리 고분은 지방도로 확장공사 중 발견되어 1990년 10월부터 1992년 6월까지 2년간 3차에 걸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1991년 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냉수리 일대 지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곳에서 총 86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는데 대부분이 굴식돌방무덤(橫穴式 石室墳)이며 구덩식 돌덧널무덤(竪穴式 石槨墳)이 일부 존재하고 있다.

  한편 냉수리 신라비는 1989년 4월 6일 냉수리 차평들에서 우연히 발견된 고신라시대의 비석인데, 앞면 아래의 너비 73㎝, 왼쪽높이 47㎝, 오른쪽 높이 66㎝, 두께 30㎝의 부정형 육각형인데, 앞면에 12줄 152자, 뒷면에 7줄 59자, 윗면에 5줄 20자 등 모두 231자의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이 비는 5~6세기 신라의 경제사, 법제사, 사회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당시의 정치, 제도 등을 살필 수 있는 용어와 내용을 상당히 포함하고 있으며, 이두의 성립시기와 발전과정을 추적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등 여러 분야에 가치 있는 금석문이다.

  그 이외에도 필자가 지난번 한차례 언급한 것처럼 칠포에서 한동대 뒷산으로 연결되는 구릉에 알려지지 않은 중소규모 고무덤들이 존재한다. 이곳은 서기 원년에서 7~8세기에 이르는 기간 지방호족들이 득세하던 곳이기도 하고, 추후 서라벌의 일부가 되기도 하고, 후에는 고구려의 영향이 크게 미치기도 하는 지역인데, 이 무덤들은 일부 도굴되기도 하고 아직 묻혀 있기도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 있다고 생각된다. 당연히 이러한 무덤들에 대한 조사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대경일보 2021년 3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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