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학도의용군 이야기

재일동포학도의용군 이야기

구 자 문 한동대 교수
    살다보면 슬프고 한 맺힌일이 없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고는 하지만, 20세기 들어서면서부터 불어닥친 일제의 침략과 35년간의 압제, 해방, 그리고 6.25. 이루 말할 수 없는 그 고통의 세월들을 필자는 상상만 해 볼뿐이다. 이 시대는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세대가 겪어야 했던 힘들고 원통한 날들이었다. 1970~80년대를 지나고 2020년대를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경제사회 그리고 정치적인 어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발전된 조국에 살고 있음이 정말 다행이고 행복하다고 생각된다.   특히 남북의 분단,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6.25 전쟁의 비참함이 다양한 기록들로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여러가지 사연들중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6.25전쟁시 자진 참여한 600여명의 재일동포학도의용군에 관한 것이다. 이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2차대전이 끝나고 5년 후 발생한 6.25전쟁이 끝난후 7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도 아직 청산하지 못한 과거가 존재하고 지금도 일본과 한국간에 서로 무시하고 질투함이, 때로는 무찔러야 할 적으로까지 비화될만한 응어리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도 그 응어리의 선한 피해자들이라는 것이다.
  오늘 유튜브에서 본것은 6.25전쟁 당시 일본에 살면서 일본인 여자를 아내로 맞아 3살배기 딸, 뱃속의 아기 까지 3식구를 일본에 두고 전쟁에 참여 했다가 종전후 돌아가지 못하고 한국에 눌러앉을 수 밖에 없었던 한 노인의 이야기 였다.  동족상잔의 6.25전쟁은 국민들뿐만 아니라 해외에 머물고 있던 동포들에게도 큰 충격과 고통을 안겨주었었고, 재일동포사회 또한 6.25 전쟁 발발 소식에 큰 충격에 빠졌었다. 세계 각지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열세에 놓인 국군에 대한 보도는 재일동포들의 참전 결심에 불을 지렀다. 당시 지원서를 제출한 1,000여명의 재일동포 청년들 중 신체검사와 심사과정을 거쳐 최종 선발된 인원은 총642 명이었다. 이들은 병역의 의무도 조국의 부름도 없었지만 조국이 전쟁의 포화 속에 휩싸였다는 소식을 듣고 조국을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현해탄을 건너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전했던 것이다. 이들이 가장 먼저 투입된 전투는 인천상륙작전이다. 미7사단에 배속된 78명의 재일동포학도의용군 1진의 성공적인 상륙을 시작으로 그들은 본격적으로  6.25전쟁에 뛰어들게 되었다. 그들은 미8군과 한국군부대에 배치되어 서울탈환작전, 압록강 혜산진전투, 원산상륙작전, 장진호전투, 백마·금화지구전투 등 각종 전투에 참전하였다. 한 생존한 재일동포학도의용군은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은 우리를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괄시를 참 많이 받았죠. 그래서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조국이 얼마나 소중한 지 피부로 느꼈고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칫하면 나라가 없어질 판국인데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있었겠습니까?”  재일동포학도의용군들은 치열했던 6.25전쟁의 곳곳을 누비며 공을 세웠고 642명의 재일학도의용군 중 135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발효로 일본이 주권을 얻기 이전에 부상 등으로 제대한 265명은 가족이 있는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나, 그후 제대한 242명은 한국에 남을 수 밖에 없었는데, 유튜브의 그 노인은 한국에 남게된 이들중 한명이다. 일본은 출국심사도 받아주지 않으면서 “너희 나라 찾아 갔으니, 그냥 거기서 살아라.” 하면서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국제미아가 되고 이산가족이 되었던 것인데, 언어 서툴고 가족 없는 한국땅에서 이들의 힘겨운 삶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분은 일본 식구들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아마 일본에 받아주지 않아 전해지지 않은 것은 것 같다고 했다. 그곳에서도 이곳 주소를 모르니 연락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이 분은 기다리고 기다리다 일본 귀국을 포기하게 되고 한국에서 한 여인을 만나 가정을 꾸리게 되고, 어려운 형편 가운데 수많은 세월이 흐른 것이다. 이분은 떠난지 63년이 되던 몇년전 재일본학도의용군모임의 초청을 받아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고 그때 가족의 생사를 알아보자고 나섰던 모양이다. 이 분의 나이는 88세, 일본인 부인 나이는 86세, 딸은 64세라고 했다. 뱃속에 있던 아이는 이름도 모르고… 하지만 수많은 세월이 흘러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고 아는 이도 없었다.
  하지만 민단 및 그곳 지자체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이분의 딸이 발견된 모양이다. 그 딸은 가정을 꾸리고 살아왔으며, 어머니는 다시 결혼하지 않고 평생 혼자 사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아버지가 오래전 돌아가셨다는 말만을 해주었을뿐, 그가 누구인지 아무 이야기도 들으바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신문기사에 난 사진이 자기가 지닌 사진과 같아서 연락이 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남편에게도 자식들에도 아직 알리지 않아서 지금 만나고는 싶지만 아직은 아니라고 했다. 그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서 유튜브 시청자에게도 전해지고 있었다. 이 노인의 이해한다는 대답. 그리고 전화를 끊고, \’다 내 잘못이다\’라는 자책과 흐느낌으로 방송은 끝이 나고 있었다. 재일동포학도의용군을 비롯해서 해방후 잠시 귀국했다가 일본정부의 입국불허로 인해 식구들 있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재일동포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안타까운 일들이 아닐수 없다. 우리민족이 이러한 어려움을 딛고 지금의 발전을 이룩한 것을 생각하면 우리나라가 더욱 소중해지고 더욱 잘 가꾸어나가야 할 터전임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대경일보 2020년 1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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