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추석, 이번 추석
구 자 문 한동대 교수
추석에는 식구들이 모인다. 부모님께서 자식을 여럿 낳았고, 다들 결혼하여 손자들도 있으므로 대부대이다. 시집간 누이들도 차례는 각자 집에서 지내지만 저녁에는 모두들 부모님께 모이는게 우리집 전통이다. 아버님은 몇년전 돌아가시고 어머님이 생존해계시므로 더욱 애틋한 마음으로 모이는 것 같다. 물론 외국에 거주하는 경우 안부나 전하는 경우가 많지만 국내에 거주하는 이들은 다들 모인다. 서울이나 인근에 거주하는 형제들은 일주일에도 한두차례 어머님을 뵙지만 필자만이 좀 떨어진 지역에 있는 상황이라 명절때나 뵙게 되니 죄송한 마음이 크다.
추석 아침에는 간소하게나마 차례를 지낸다. 그리고 그 음식을 나누어 먹고 차례상에 올렸던 술도 한잔씩 나누어 마시고 생율도 한두알씩 씹어 먹는다. 그후에는 밥과 국을 차리고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밀린 이야기에 꽃을 피운다. 낮동안에는 생존해계신 막내 작은아버지께서 어머님 방문차 아들을 대동하고 찾아 오신다. 아버지는 5형제였는데, 모두 돌아가시고 막내 작은 아버지만 생존해 계시며, 큰어머니 작은 어머니들도 모두 돌아가시고 우리 어머니만 생존해 계신다.
필자가 초등학교 4~5학년때, 할아버지는 이미 70대 후반이셨는데, 옛 어른들 그러하듯 흰수염을 기르시고 한복을 입으셨고, 장날때면 십리밖에서 읍내로 장구경 오셨는데, 점심은 꼭 우리집에서 하셨고, 식후 약주한잔 데워 드리면 아주 유쾌히 들고 계셨다. 좀 몸이 않좋으실 경우 어머니께서 약주를 반잔만 데워 드리면 \’괜찮아 조금만 더 줘\’ 하시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구한말에 태어나셔서 한일합방 당시 20살 좀 넘으셨을 할아버지께서는 크게 직업을 가지신적이 없어도 학문을 많이 하시고 산천유람을 잘 다니셨는데, 그 당시 시대가 젊은이들을 그리 할 수 밖에 없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나라가 해방될 즈음 필자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을 하셨는데, 그때 할아버지 할머니는 이미 60이 되셨었다.
그때 추석에는 아버지와 우리 아들들은 할아버지 계신 큰집에 모였었다. 필자도 7~8살쯤 차례지낼때 서투르게 나마 함께 절도하고 음식도 함께 먹었다. 그때 젯상은 대부분 벌레가 끼지 않게 튼튼한 은행나무를 말리고 켜서 한동네 사는 소목으로 불리는 분이 제작을 했으며, 제기들도 오래썼지만 잘 관리를 해서인지 늘 반짝거렸다. 그후에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그곳 아이들과 놀기도 하는데, 대부분 종친들로서 나보다 나이도 많고 항렬도 높은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종갓집 격인 집안 아들이라서인지, 작지만 기운이 세다고 느끼어서인지, 아니면 사촌형들이 무서워서인지 아무도 시비를 거는 애들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추석이 좀 이른 경우가 많아서 논에는 아직 벼들이 수확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는데, 그때는 메뚜기들이 많았다. 메뚜기를 손을로 훒다시피해서 잔뜩 잡아 연탄불에 구워먹기를 즐겼다. 때로는 도랑에서 망달린 챗바퀴로 붕어며 미꾸라지를 잡기도 했는데, 이도 역시 구워먹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가장 좋아 하던 것은 군밤으로 뒷동산을 돌아다니며 가시에 찔리기도 하며 밤을 주워오면 사촌형들이 터지지 않게 껍질을 일부 벗기고 구워주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명절이면 아이들은 새옷을 사입었는데, 그게 일년중 새옷을 얻어입는 유일한 기회였을 것 같다. 그리고 대부분 검정고무신을 새로 사 신었다. 필자도 어린마음에 우리 어머니는 명절에 새옷을 왜 안사주시나 약간의 불만을 지니기도 했었지만, 곧 우리집은 명절 아닐때라도 옷을 사입기도하고, 집에 괜찮은 옷들이 없지도 않을 뿐더러, 어머니가 잘 빨고 손질하여 입혀주시니 명절날 꼭 옷을 사입어야 할 이유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후 50년도 더 세월이 흐른 것이다. 고향이자 원적지인 보령에 가본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크지도 않은 한국땅에 살면서 초등학교 친구들과 사촌들이 아직 그곳에 있는데, 서울과 포항만을 오갈 뿐이다. 그래도 식구들은 추석에 서울집에 꼭 모인다. 모임이야 추석, 구정, 부모님생신 등에 식당 등에서 모이지만, 추석 오후에 식구들이 서울집에 모두 다 모여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이러한 모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코비드19으로 말미암아 정부에서도 \’고향 않가기\’ 캠페인을 벌일 정도이니, 팬데믹 상황이 얼마니 심각한지 알겠고 국민들도 동참하게 된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방역수준이 세계 최고 수준인데, 자칫하면 확산될 가능성이 높아서 경제활동이며 교육활동 등이 더 이상 문제가 되어서는 아니되기에 방역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것이다. 하지만 어쩔수 없이 고향에 가야할 경우가 없지는 않다. 필자도 마찮가지였다. 코비드19 핑계로 연로하신 어머니를 정말 오랬동안, 그러니까 올초 구정이후 찾아 뵙지 못했었다. 망설이다가 KTX 예약도 못했고 다행히 비행편이 가능해서 마스크 잘 착용하고 사회적 거리를 잘 지키면서 비행기에 올랐고 무사히 어머니 계신 서울에 잘 다녀올 수 있었다. 사회분위기에 맞춰 식구들이 어른들만 잠시 모였었고 차나 한잔씩 마셨을뿐 식사는 하지 않았다.
영남경제 2020년 10월 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