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생 부모님과 자식들 이야기 (상)

1920년대생 부모님과 자식들 이야기 (상)

구 자 문 한동대 교수
  일제 때 태어나 일제의 교육을 받고 자란 필자의 부모님은 20대 초중반에 일제로부터 해방됨과 조국의 독립을 철들어 겪은 세대이다. 하지만 19세기 구한말에 태어난 조부님 세대들에 비해 일본말을 잘하고 일본의 정치사회에 익숙했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그 당시를 찍은 영화들을 보면 우리나라 모든 이들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만세운동과 무장투쟁을 감행한 것 같아 보이지만, 일반인들은 그 정도까지는 생각지도 행하지도 못했고, 이를 설명해준 이도 드물었으니, 일제로부터 차별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체제 안에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물론 적지 않은 이들이 1911년부터 10년간 운영된 만주 ‘신흥무관학교’에도 가고, 1919년에 임시정부도 수립에 참여하고, 무장독립투쟁을 벌이기도 했으니, 그들의 깨인 조국애와 결단이 대단한 것이다. 필자의 부친도 해방 이후에야 1948년 발간된, 근래 식민사관이 지나치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는 이병도의 ‘조선사대관(朝鮮史大觀)’을 공부하며 조국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배우게 되었을 것이다.  

  필자의 부친은 1935년에 소학교를 마치고 서울의 일본인 회사에 취직해 있으면서 1940년을 넘어서며 대학입학자격시험을 통과하고, 고등문관시험을 보기 위해 예비시험도 합격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말기에 징용을 피하기 위해 고향 가까운 공주군청에 취직했고 높은 망루에서 미군 폭격기 출현 감시 임무 등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같은 처지의 외삼촌을 만나 그의 여동생과 결혼하고 해방을 맞은 것이다. 그 후에도 공주군청 서기생활은 계속되었다. 특유의 성실함과 업무 능력으로 직장에서 좋은 평을 듣고 있었고, 신생 조국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던 차에 6.25가 터진 것이다. 이 민족상잔(民族相殘)의 큰 전쟁으로 그 세대의 많은 이들이 죽고, 다치고, 가족들이 헤어지고, 큰 경제사회적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조부 및 부친 형제자매들은 고향으로 피난 와서 죽거나 다치지는 않았지만, 인민군 점령 하의 시골마을에서 젊은이들은 인민군에 강제로 끌려가고, 남아있던 이들도 사상논쟁이며 부역여부로 죽고 다치며 고생을 겪었던 것은 사실이다. 물론 경제활동도 제대로 못하고 양식도 떨어지니 매우 힘든 시기였다고 본다. 우리 부모님도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환영하며 비교적 자유롭게 살고 계셨지마는 다른 분들도 그러했던 것처럼 민주주의/공산주의, 즉 이념(Ideology)에 대해서 제대로 배운바 없으셨을 것이며, 공산치하에서 어떻게 식솔들을 상하지 않고 보전해야 할지 힘든 노력을 기울이셨던 것 같다.

  필자가 국민학교 2~3학년 무렵 우리 집 앞에 신식으로 극장이 지어져 어른들을 따라 자주 영화감상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영화가 보통 김승호, 최은희, 최무룡 등이 나오는 일제 혹은 전쟁 중의 사랑이야기이거나 장동휘, 황해, 신영균 등이 나오는 전쟁영화였다. 따라서 어린 나이에도 필자는 영화배우 이름을 잘 외우고 있었다. 김승호씨 사망 후, 누군가가 6.25때 배우 일행이 인민군에 붙잡혀 있을 때를 회고했는데, 멀쩡하던 김승호씨가 갑자기 ‘인민군 만세’ 등을 외치며 이들과 친한척하더라는 것이다. 물론 인민군들도 며칠 지나며 험악한 자세가 좀 누그러졌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김승호씨와 일행이 탈출을 감행한 것이다. 성공적이었음은 물론이니 그후 배우생활을 이어 갔을 것으로 본다. 우리 부모님도 고향에서 온 식구가 숨어 지낼 수는 없었을 것이니 그러한 상황 하에서 국군 수복을 기다렸을 것 같다. 물론 그러한 오해 때문에 억울하게 어려움을 겪은 분들도 많았을 것으로 보아진다.

  6.25 이후 부모님 형제들은 모두 고향에 남아 계셨다. 당시 관행대로 많은 자식들을 낳아 기르고, 중등교육이라도 시키자니 다른 곳으로 떠날 엄두를 못내셨을 것이며, 6.25의 참혹함과 사상논쟁, 전후의 정치사회적 혼란함 등이 부모님 형제들을 고향에 머물게 한 것이리라. 추후 막내 숙부는 서울로 직장을 옮기시고 무역업도 하셨지만, 부친을 포함한 3형제는 고향을 떠나지 않으셨다. 전쟁 직전 부친은 고등고시 예비시험 격인 전국에서 100명 뽑는 보통고시에서 2등 합격할 정도로 실력을 보이셨지만, 전후에 상경을 포기하시고 고향에 남아 1950~60년대를 보내셨다. 하지만 여러 자식들이 자라나며 좋은 학업성적을 보이게 되니, 부모님으로서도 딜레마이셨을 것이다. 남들처럼 애들을 서울로 보내야 하나? 7남매 모두를 어떻게 다 대학을 보낸단 말인가? 아들들은 이왕이면 법학과나 정치학과 가야 하는게 아닌가? 하지만 우리 형제는 이공계로 대학을 갔다. 그 당시 추세이기도 했겠지만 막내 숙부의 문과진로에 대한 강한 반대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태평양전쟁과 6.25의 예를 들으셨는데, 살아남으려면 이공계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후 박정희 정부의 5개년 경제개발계획추진과 함께 농촌지역에는 새마을운동이 강하게 추진되었다. 필자가 그 당시 새마을운동을 잘 기억하는 것은 방학이면 고향에 내려가 마을과 논밭이 바뀌는 것을 직접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힘을 모아 마을 길을 넓히고, 지붕과 우물을 정비하고, 겨울에는 객토(客土)를 하고 있었다. 도청에 근무하시던 부친과 고향 면장을 30년 하셨던 숙부뿐만 아니라, 대학 졸업 후 농촌지도소에 근무하던 백부 장남 사촌형과 우리 집 장녀 누님도 이에 앞장서고 있었다. 현재 경북도는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곳이 ‘청도군 신도마을’이라 주장하고, 필자를 포함한 포항시민들은 ‘영일군 문성리’라 주장하고 있지만, 과거 3.1만세운동이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듯이 새마을운동도 1960년대 농촌운동으로 시작되어 1970년대 초 좀 더 체계적으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진행되었음이 사실일 것이다. 다만 지금 새마을운동이 힘을 잃고 있는 상황에서 그래도 경북도의 노력이 새마을운동을 제2새마을운동으로 그리고 새마을운동세계화로 이끌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대경일보 2025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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