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기록 다양한 관점의 해석 모두 중요
구 자 문 한동대 교수
많은 이들이 우리나라에 고려시대 이전의 역사기록이 부재함을 한탄하고 있는데, 이는 이웃 일본과 중국의 고기록들 존재에 비추어 아쉬움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가장 오래된 사료 활용 가능 기록은 고려시대 삼국사기와 다소 설화 같은 삼국유사가 전부이다. 따라서 우리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같은 중국사료나 일본사기 같은 일본사료를 참고할 수밖에 없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과 2001년 등재된 \’승정원일기\’를 보면, 그 방대한 양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데, 이러한 기록이나마 존재하여 우리의 중-근세 역사나마 자세하게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언급했듯이 고대 및 중세사 기록이 적은 것은 많은 침략에 시달리고, 내부 분란도 많았던 탓에 사료가 될 기록들이 변변히 남아나지 못했고, 있는 자료들도 중국에 사대하는 국내외적 상황에 따라 크게 훼손되고, 소실되고, 감춰진 탓이다. 특히 근세 들어 실증사학이라는 미명하에 일제의 식민사관이 역사적 사실들을 체계적으로 왜곡하고 조작하였는데, 현재에도 우리는 반증할 역사적 사료 부재로 아무 반박 못하고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 경우가 흔하니 원통할 뿐이다. 해방 후 발굴된 연천리 구석기 유물이나 청동기 유적과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어떤 면에서 중국보다 앞서는 수준의 문명이 존재했음을 보여주게 되었고, 요녕성의 홍산문명이 중국의 것이 아닌 동이족의 것임이 나타내고 있지만 아직은 제대로 증명되고 있지 못하다. 고구려의 수도 위치며 광개토왕의 정복 영역이 만주만이 아닌 중국 중심부를 모두 포함할 정도로 강대했다고 하지만 이도 제대로 된 기록이 없으니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조선 초중기에 처음으로 제작된 몇몇 집안의 족보들을 보아도 그러하다. 시조들의 이야기는 대개 설화같이 시작한다 하더라도 대부분 기록들은 고려시대 중시조로부터 시작되는데, 그후로도 대개 300년 정도의 공백기 후에 사실적인 기록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공백기간이라도 선조들이 사리지지 않고 대를 이어 왔을 것인데… 필자의 집안도 조선 초중기에 족보가 만들어진 몇 않되는 집안 중 하나로서, 분명 선조들이 부여/예맥계로서 백제/가야인으로 살아왔을 것인데, 시조가 중국계로서 고려 중기에 우리나라에 정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와 부합되지 않게 그 시조가 고려개국공신으로 기록되어 있어, 300년간의 공백이 일치되지 않게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백제와 가야의 옛 영토에 구씨들이 적지 않게 살고 있었고, 고려 태조 왕건이 태봉국 최고위 재상이던 시중(侍中) 구진(具鎭)을 해상무역과 영토방어의 중심지였던 나주지방에 책임자로 보냈던 기록이 존재하고, 그로 인해 능성구씨(綾城具氏)의 본적이 그곳으로 정해진 것으로 유추되는데, 사대사상에 젖은 당시 풍조대로 제대로된 고증없이 조선 초중기에 집안의 한 선도그룹이 시조가 중국에서 온 것처럼 꾸미다 보니 시대적 불일치가 생겨난 것이다. 고려개국공신은 선시조이고, 300년후 그분은 중시조라고 해야 할텐데, 그후 현재까지 이를 깊이 연구/수정하려는 노력도 없었지만 사료가 변변치 못하니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우리 집안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30년전 필자가 미국에 있다 귀국하여 대학에 막 자리 잡았을 때, 한국수자원공사의 ‘신도시개발사’ 집필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 그 기관의 신도시개발사업이 30년 정도 진행되고 있었고 그 당시 참여했던 분들이 막 은퇴했을 즈음이었는데, 관련 자료들을 찾을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분명 당시의 관련 공문서들이 존재했을 터이지만 그 기록들이 어디에 존재하는지 찾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 당시의 에피소드라고 얻고자 궁여지책으로 그 당시 공사에 참여했던 분들을 인터뷰했던 기억이 난다.
또한 한국의 새마을운동에 관해, 특히 가장 먼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고 잘 진행된 곳들중 하나인 포항지역의 새마을운동에 대해 연구를 진행하는데도 제대로된 객관적인 자료가 별로 없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새마을운동이 과거 일제 때 3.1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전국적으로 벌어졌던 운동인데, 그 당시 경북도에서는 원조논쟁이 벌어졌으며, ‘포항시 기계면 보다 청도군 신도리가 원조다’라는 주장을 그 지역이 고향인 도지사를 중심으로 강하게 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그 당시 도청신도시도 낙후지역 개발을 이유로 내륙인 그 이웃으로 결정된 것임을 알고 있다. 지금 필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새마을운동 진행 당시부터 그 이후 신새마을운동과 원조논쟁이 진행될 때, 제대로 참고 할만한 관련 자료가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몇 않되는 정부기록이나 신문기사가 다이고, 초기에 참여했던 고령의 마을 분들의 주관적인 회고담들이 다였다.
현재 우리 한국은 경제적인 불황 가운데 있지만, 세계사에 전후무후한 짧은 기간 안에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변모된 나라이고, 현세대의 한국인들은 할아버지할머니 세대를 포함한 선조들이 누리지 못한 번영된 삶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다 알다시피 근래의 국내정치는 혼돈 가운데 있다. 경제산업은 발달되었을지언정, 국토는 작고, 인구도 많지 않고, 정치사회도 다양함을 품을 만큼 성숙되지 못했다. 아직도 남북분단 및 대치상황이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논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다양한 주장과 논리하에 혼동상황이라 하더라도 곧바로 제대로 된 길을 찾아가면 좋으련만,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고 있다. 젠틀한 대화도 토론도 부재하니 다양한 이론, 6.25 및 경제개발을 포함한 역사적 경험, 국내외 정세 등을 종합해가며 국가의 갈 길을 찾아내지 못하고, 지역갈등 바탕의 흑백논리에 매여 있는 경우가 많음이 우리 사회의 현실인 것이다.
대경일보 2025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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