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사할린, 그리고 포항

연해주, 사할린, 그리고 포항

구 자 문 한동대 교수
  요즈음 연해주에 오래 거주하던 분을 만나고 있다. 이분은 경북 영천 출신으로 1990년대 초반부터 러시아에 거주하며 사업을 하던 분으로 부인은 사할린 출신 동포 2세로 자녀들은 모두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 살고 있다. 이분을 알게된 연유는 필자가 거주하는 동네 지인들 중 부동산업을 하면서 러시아무역에 관심이 많은 분이 있고, 직접 연해주에서 지난 10년째 배추농사를 짓는 분도 있기에, 그동안 환동해권 관련 연구를 진행하던 필자로서도 이들과 자주 만나기도 했었는데, 러시아에 오래 거주하던 부부가 최근 돌아와 포항에서 러시아-한국 연계의 수산업 관련 일을 추진한다 해서 아이디어 교환차 만나게 된 것이다. 연해주는 동해(東海)와 중국 둥베이(東北)지구 사이에 위치하며 원래 이름은 프리모르스키이다. 원래 소비에트극동공화국이었으나 1926년 극동지구로 바뀌었고, 1938년 극동지구의 일부가 분리되어 지금의 연해주가 되었다. 2015년 기준 인구는 193만 3,308명으로 주민 대부분이 러시아인(85.6%)이며, 우크라이나인(2.5%)과 고려인·타타르인·우즈벡인·벨로루스인과 같은 소수 민족이 나머지를 차지한다.

  인구 60여만의 블라디보스토크는 아시아권 러시아의 주요항구이며,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태평양 연안 종착지이며, 무르만스크에서 러시아 북극해안을 따라 뻗어 있는 북해항로의 동쪽 종점이며, 첼류스킨 곶 동쪽에 있는 북극해 연안 항구에 물자를 공급하는 중요한 보급기지이다. 오늘날 국제 해상무역은 대부분 블라디보스토크 동쪽의 나홋카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주요수출품은 석유·석탄·곡물이며 석유제품과 생선이 주요수입품이다. 극동지역의 다른 항구에서 잡거나 가공한 생선도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해서 다른 지역으로 수송된다. 연해주의 기후는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겨울에는 몹시 춥고, 4계절 내내 북풍이 끊이지 않는다. 바다에서 육지 쪽으로 남동풍이 부는 여름에는 비가 많고 따뜻하다. 남쪽 우수리강과 한카호 주변의 비옥한 저지대에서는 콩·수수·벼 재배가 이루어지고, 채소재배와 낙농도 활발하다. 탄광산업이 여러 도시의 다양한 제조업을 뒷받침하고 있다. 레티호프카와 노보샤흐틴스크에는 노천 석탄광산이 있다. 주석·납·아연·형석도 채굴된다.

  이분은 러시아에 있으면서 수산업종에 주로 종사해왔지만,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광업으로 돈을 벌며, 때로는 목재벌목, 수산업 등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이분은 지금 포항에 정착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우선 지인들과 협동으로 러시아의 연어, 명태, 고등어 등을 냉동 수입하여 필렛(Fillet)으로 가공하여 판매하고자 하며, 차차 조개류, 대게, 킹크랩 등으로 사업 범위를 넓히고자 하고 있다. 물론 현지에서 작은 규모로 명태껍질로 ‘콜라겐’을 제조하여 판매하기도 했었다. 환동해권 활성화에 관해 지난 20년간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필자로서 이분들이 포항에서 사업을 운영해 나가되, 우선 지금 부산항으로 수입하는 냉동컨테이너를 포항 영일만항으로 수입해 올 수 있어야 하고 가공공장도 그 배후단지에 조성해야 한다고 보며, 2단계사업으로 수조를 부두가에 조성하고 직접 킹크랩, 대게 등 활어들을 500톤급 전용 수송선에 실어 올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으로 본다. 물론 포항시와 지역 주민들도 이를 적극 지원하여 영일만항 및 배후단지가 환동해권 농수산제조 및 물류단지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분 부인이 살던 사할린은 러시아에서 가장 큰 섬이자, 세계에서 23번째로 큰 섬이기도 하다. 이곳은 대륙성 기후로 춥고, 여름이 짧고, 겨울이 6개월에 달하며, 겨울의 평균 기온은 –19°C에서 -24°C 사이이며, 북쪽지역은 40°C까지 내려가는데, 몇몇 항구는 장기간 얼음으로 뒤덮여 있다. 주요 산업은 광업이며, 그 밖에 석유, 석탄, 천연가스, 펄프, 제지업, 어업과 어류가공, 임업·제당업, 목축 등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러시아인(78%)이고, 우크라이나인이 7.4%, 그리고 최대 소수민족인 한인은 6.5%이다. 19세기에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간 조선인 중 일부가 러시아 영토인 사할린섬 북부로 넘어간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까지 이러한 인원은 소수였으며,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까지 일제에 의해 사할린섬으로 강제징용되면서 본격적으로 한민족의 사할린 이동이 시작되었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국가총동원령으로 인해 약 15만 명이 강제동원되었다가 2차대전 말기에 10만 명이 일본으로 재배치됨에 따라, 1945년 잔류 인원은 약 4만 3,000명으로 알려져 있다. 1992년부터 추진된 영구귀국사업으로 2007년까지 2,221명의 한인 1세가 한국으로 영주귀국하였다.

  이분 부인은 사할린동포로서 60세가 좀 넘으신 분인데, 어릴 때 한국인들의 삶은 매우 절망적이었으며 차별도 많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북한의 어려운 생활상만 알려지고 있기에 한국도 당연히 그 정도로 여겨지고 있었고 오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1988년 서울올림픽이 거행되며 한국의 영상이 보여져, 우리 한국이 그렇게 잘 사는구나 모두들 놀라며 좋아들 했다고 한다. 하지만 1세들은 그때 이미 돌아가셨거나 무국적자로 연로하신 상황들이라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의 혼란으로 한국은 이들을 송환할 여력이 없었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냉전으로 한국과 소련이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사할린의 한인들은 한국·소련·일본 세 나라의 무관심 속에서 무국적자로 어려운 삶을 살았었다.

대경일보 2022년 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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