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주의와 지속가능한 개발, 그리고 실천의 어려움
한동대 교수 구 자 문
독일의 에른스트 헤켈이 1866년 진화론을 배경으로 생물과 환경의 관계를 연구하는 과학을 제창하고 이를 에콜로지(Ekologie)라고 불렀다. 에콜로지의 본질은 \’관계\’로부터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개개의 생물과 무생물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이 관계의 네트워크로 연결되고 그 연결로 인해 개개의 존재가 그 존재를 보증 받는다는 것이다. 이 의식으로 부터 ‘상호의존’이나 ‘공생’ 같은 에콜로지의 중요한 원리가 나온다. 따라서 인간도 물질적·정신적으로 자연환경 안에서 다양한 존재와의 관계 하에 생명을 유지해가는 것이며, 이 관계로부터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근대화가 시작된 이래 자연은 개발의 대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어느 정도 보호의 대상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놔두었다가 나중에 이용하자는, 개발 논리 안의 하위 적 발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을 정복해서 물질적 풍요를 누린다는 것은 근대사회가 추종해온 ‘최고의 목표 내지 법칙’에 속했다고 보아진다. 지배와 정복의 객체로서의 자연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 녹색주의자들의 신념이다. 자연과의 조화, 좀 더 나아가 자연에 대한 겸손과 외경을 말하는 것은 오늘의 생태적 위기에 대한 대응책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에콜로지의 원칙에 충실한 삶의 자세가 녹색주의자들의 신념이자 이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녹색주의자들은 생태계 파괴에 대한 대안으로 ‘농업중심의 자립공동체’의 설립을 주장하는데, 이는 간디가 주창하던 ‘자기 충족적인 소농촌공동체 운동’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간디는 흔히 물레를 돌리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것은 간디의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라고 할 수 있다. 간디는 모든 인도 사람들이 매일 한두 시간만이라도 물레질을 할 것을 권유했다. 물레는 인간의 노역에 도움을 주면서도, 대규모 공장들과는 달리 결코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는 인간적 규모의 기계의 전형이라는 것이다. 그는 영국에서 수입되는 직물을 거부하고 인도의 민중들이 한동안 잃어버리고 있던 전통적인 가내수공업을 부활시켜 스스로 생활필수품들을 자급자족하자고 주장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식민지의 착취구조로부터 이탈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간디의 비폭력 비협력주의는 영국정부의 식민정책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투쟁적인 방책이었다. 간디가 구상했던 이상적인 사회는 ‘자기 충족적인 소농촌공동체’를 기본으로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중앙집권적 국가기구의 소멸과 더불어 마을민주주의에 의한 자치가 실현되는 공간이었다.
녹색주의자들은 ‘오늘의 생태적 위기가 정치경제의 문제이자 철학, 도덕, 내지 종교의 문제’라고 말하는 가운데, 우리 앞에 넓은 실천의 영역이 남아있음을, 또한 우리의 의식과 삶의 방식에 ‘총체적인 전환’이 있어야 함을 일깨우고 있다. 흔히 아메리카니즘(Americanism)으로 표현되는 근대 자본주의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혹은 ‘큰 것이 더 좋고 새것이 더 좋다’는 의식과 생활방식을 떠나 지극히 자원절약적이고 환경친화적인 삶의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녹색주의자들은 환경정복 내지 파괴적인 자연관만이 아니라 근래 주된 개발패러다임이라고 볼 수 있는 \’지속가능한 개발\’을 추진하려는 기술주의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지속가능개발의 주 개념이 개발과 보전의 조화이면서도 경제개발이 무시될 수 없는 입장인데 비해서, 녹색주의는 환경보전 자체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녹색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박하는 이들도 많다. 우리가 아무리 자원절약적으로 산다고 해도 지금까지 이룩한 근대문명과 생활편의를 어찌하고 ‘나물먹고 물마시고’ 살아야 한다는 것인가? 좀 더 현실에 맞는 구체적인 적용 가능한 생태전략을 제시하라는 것이다.
현대사회에 있어서 녹색주의도 간디의 소농촌공동체운동도 다양할 수밖에 없는 사회사상 내지 저항논리의 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으며, 당연히 유사하거나 대비되는 주장들도 존재한다. 이들이 실현가능한 공공정책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담론과 토론을 거쳐 좀 더 구체적이면서 사회적 동의를 획득하여야 함이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악화되는 현실, 제한된 시간, 그리고 현대사회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자원 소모적이고 환경파괴적인 삶을 관성적으로 이어가는 우리들이다. 또한 누구든 지구환경의 파괴를 원치는 않겠지만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혹은 조금이나마 남들을 위해서 본인의 이익과 편익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음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환경오염이 극심한 지구촌 여러 곳을 다녀보면서, 공생이라는 에콜로지의 주개념의 중요성을 체험하고 있다. 빈곤한 나라일수록 환경오염과 빈부의 격차가 심함을 보면서, 이러한 문제의 해결이 첨단과학의 시대라지만 복잡다단한 정치경제사상하의 그리고 지극한 개인주의하의 현재의 지구촌에서 어느 한 그룹의 노력만으로는 이루어지기 힘듬이 현실임을 새삼 느끼고 있다.
2016.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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