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과 벼농사
구 자 문 한동대 교수
한동안 모내기가 진행되더니 이제 넓은 들이 벼들이 자라나 푸르러 질 것이다. 우리나라는 전 국토의 70%가 산지라서 평지가 적은 편인데, 도시화지역을 뺀다면 많은 평지가 논으로 되어 있을 정도로 벼농사가 성행하고 있다. 벼를 재배하기 위해서는 기온이 섭씨 13도 이상이어야 하고, 충분한 물이 필요한데, 이도 겨우 맞춰지는 조건이었지만, 소출량도 적어서 양반 계급만 쌀을 먹을 수 있었을 뿐, 90% 이상의 일반 국민들은 잡곡으로 살아왔다고 한다. 대부분 작물들은 그냥 씨를 땅에 심거나 뿌려서 거두는데 벼는 모내기를 통해 다른 곳에서 키운 뒤 옮겨 심는다. 모내기는 고려말 이앙법이 도입된 후 조선 중·후기에는 남부지방 90% 이상이 이 방법으로 벼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근세에 이르러 관개시설이 늘어나고, 비료 및 객토 등 농사방법의 발달, 특히 1970년대 초에 통일벼가 개발되면서 수확량이 크게 늘었다.
1960~70년대 초반만 해도 우리나라에 쌀이 부족했다. 그래서 정부가 미국원조품 밀가루 음식을 장려했고, 쌀 대신 고구마로 술을 만들게 했고, 쥐들이 곡식을 먹어치우기에 전국적인 쥐잡기 운동을 벌였었다. 그런데 생산성 높은 통일벼가 개발되어 한시름 놓게 된 것이었다. 물론 초창기에는 맛이 없어 일본종자 소위 ‘아끼바리’를 비싸게 사서 먹는 이들도 없지 않았는데, 지금은 한국 쌀 하면 모두 품질 좋은 종류들이다. 이제는 국민들의 쌀 섭취량도 줄어들었고, 다른 음식들을 먹기에 쌀은 남아도는 상황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전 국토에서 논 비중이 예전과 큰 변화 없을 정도로 지금도 벼농사를 많이 짓고 있다. 이는 지난 수십년간 진행된 정부가 ‘농공병진정책’의 일환으로 농가소득보전을 위해 쌀을 고가에 수매하고 저가에 방출하는 ‘이중곡가제’의 영향도 컸고, 근래의 정부의 ‘영농손실 보상제도’, 그리고 전쟁시 내지 경제불황시를 대비한 ‘우리 농업 살리기 정책’ 등의 영향이라고 보아진다.
세계의 3대 곡물은 쌀, 밀, 그리고 옥수수인데, 쌀은 에너지와 영양면에서도 밀이나 옥수수보다 우수한 식량이다. 단위 토지 당 인구부양력은 ha당 연간 쌀은 22명, 밀은 14명, 그리고 옥수수는 19명이다. 하지만 옥수수는 영양분이 부족하여 이를 주식으로 하는 중남미 어린이는 단백질이 부족해 발육장애, 피부질환, 근육 쇠약, 장기 기능이 저하되기 쉽다고 한다. 쌀은 지금 세계 많은 곳에서 소비되지만 주산지는 물이 풍부한 열대와 아열대 지방이다. 그러나 온대지방인 우리 한반도에서 쌀농사가 성행하는 것은 농업용수도 비교적 잘 공급되고 사람들이 쌀을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쌀은 식감이 좋고, 다양한 음식과 술을 만들 수 있다. 또한 벼농사가 밭농사에 비해 비교적 수월한 편이며, 현대에도 기계화가 좀 더 수월하다고 한다.
벼가 언제 어느 곳에서 처음 재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인도설, 동남아시아설, 윈난·구이저우설·화남설·양쯔강 하류설 등의 중국설, 인도 아삼·중국 윈난 지역설, 필리핀 또는 그 인접 도서설, 아프리카설, 아시아 동남부 및 아프리카 양 지역설 등이다. 우리 한반도에서 출토된 벼 재배의 흔적 가운데 가장 위쪽에 자리한 평양 남경 유적의 연대는 기원전 10세기이다. 이에 따라 한반도의 벼농사는 3000여년전, 즉 청동기시대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쌀과 관련된 자료는 1920년대 김해 패총에서 발견된 탄화미가 전부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쌀은 기원 전후에 일본을 통해 유입되어 재배되었던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여주 흔암리 주거지에서 기원전 10세기 경의 탄화미가 다량 출토되어 우리나라 벼농사의 시작이 일본보다 앞선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후 평양 남경, 부여 송국리 등에서 탄화미, 토기바닥에 볍씨 자국이 찍힌 민무늬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최근 1997~98년 충북 청주시 옥산면 소로리에서 발견된 12,500~14,800년전 구석기시대의 토탄층에서 볍씨가 발굴되고, 그 이전 층에서 유사벼가 발굴되어 크게 주목받고 있다. 이 볍씨는 지난 고대 볍씨들보다 3000년이나 앞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인 것으로 밝혀져, 벼의 기원·진화·전파에 관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 당시 한반도에 살던 주요 인류들이 누구였는지는 잘 파악되고 있지 않지만, 열대도 아열대도 아닌 지역에서 가장 맛도 좋고 영양도 많은 야생 벼를 세계에서 가장 먼저 재배하기 시작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그만큼 이 한반도지역이 비옥하고 삶의 환경이 좋아서 많은 갈래의 인류들이 찾아들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그만큼 먹을 것을 잘 재배하게 되고 문명도 일어나게 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분명히 이들도 형질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우리 한국인의 조상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19세기 초만 해도 낮은 평균기온 때문에 임진강 이북에서는 벼농사 자체가 어려웠다. 하지만 19세기 말 벼농사의 한계선은 더 추운 만주지방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1937년 소련의 스탈린이 연해주에 거주하던 우리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켰는데, 이때 이들이 어렵게 간직해간 볍씨를 재배하여 그 지역까지 벼농사가 확대되었던 것이다. 이는 우리 민족의 큰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불굴의 정신을 보여 주기도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쌀을 좋아하고 벼농사를 짓는 데 유능한 민족인가를 보여 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대경일보 2023년 6월 1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