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의 역사와 옛 지명 리뷰
구 자 문 한동대 교수
포항이라는 이름은 수군진지인 ‘통양포만호진’의 남쪽에 자리를 잡은 대흥산(현 대안골짜기)에서 시작된, 형산강 북쪽에 위치한 포항강(현재 칠성천) 하구 부근이 ‘갯미기’라고 불림에서 유래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고려 우왕13년에 수군진지가 통양포(현 두호동)에 설치되고, 조선 세종 초기에 다시 흥해군 칠포로 이관했다는 기록이 있다. 갯미기는 갯목을 뜻하는데, 갯은 개울, 목은 머리에 해당한다. 이를 한자로 옮기면 개울 포(浦)와 목 항(項)이 된다. 영일군 포항읍이 1949년에 시로 승격하고 군에서 분리될 만큼 포항은 어항으로써 꽤 규모가 있는 곳으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도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이다. ‘대일(對日) 청구권 자금’을 기반으로 1960년대 후반부터 국가적 사업인 포항제철소가 건설되기 시작했고, 배후 철강산업단지가 건설되며 현재의 도시 규모로 성장하게 되었다. 1995년에 포항시와 영일군이 통합되어 인구 50~52만 도농통합시가 되었다.
울산 및 영천에서 시작되어 경주를 거쳐 포항을 휘감은 형산강은 전국 유일의 북쪽으로 흐르는 강인데, 1920년대 말 제방공사가 있기 전까지 많은 지류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 지류들은 칠성천, 냉천, 양학천, 학산천, 여을천 등이었으며 이들은 도랑을 만들고 곳곳에 못을 만들었다. 그 못들이 삼호(三湖) 즉, 두호(斗湖), 환호(環湖), 아호(阿湖)인데, 이제는 지명이나 도로명으로 남겨져 있다. 그 지류들 중 여을천(余乙川)에 나루터가 있었고, 이 하천의 끝자락이 나루끝이다. 그 강가 나루터가 도심으로 변했지만 여전히 나루끝으로 불리고 있으며, 우현동·학산동·대신동의 경계지점을 가리키는 지명 역할을 하기도 한다. 또한 포항 도심부에는 섬이 많았고 그 사이를 매립하여 도심으로 발전 된 곳이 많아서 동 이름에 죽도동(竹島洞), 송도동(松島洞), 해도동(海島洞) 등 도(島) 이름이 들어간 곳이 많은데, 매립지라서 토양이 무르고 50m 깊이에도 기반암이 나타나지 않아 고층건물 기초공사에 비용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고 한다.
우현동(牛峴洞)에서 7번 국도를 따라 넘어가는 고개는 모양이 ‘누운 소’와 비슷하다 하여 소티재라고 하는데, 이를 한자로는 ‘牛峴’이라 표기하며, 작은 고개라는 의미의 쇠티가 음이 바뀌어 소현(小峴)으로 불린 후 우현이 되었다는 해석도 있다. 지금은 7번국도를 따라 소티재를 넘어가다 보면 ‘포항해양경찰서’가 자리잡고 있고 고개를 넘어 포항KTX역에도 가고 흥해읍에도 가며, 계속해서 영덕군, 울진군 등 북방으로 연결된다. 이 소티재에서 6.25전쟁 당시 큰 전투가 벌어졌고 아군만도 800여 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학산동은 학 세 마리가 날아가는 형상을 지닌 삼학산(三鶴山)에서 유래 된 지명으로 옛 학산동 사무소 터에는 동제(洞祭)를 지낸 ‘용담제당(龍潭祭堂)’이 있기도 하다. 대신동(大新洞)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진출하여 공장을 설립하면서 새롭게 일어나는 신흥마을로 성장해 대신동이라 불렀다.
흥해읍 남송리는 1914년 남대동(南大洞), 송동(松洞), 남휴동(南休洞), 서원동(書院洞)을 합하여 남송(南松)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그중 남송3리는 못 터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 하여 짓댕이 혹은 지당(池塘)이라 했다고 하는데, 주위의 토질이 비만 오면 몹시 질컥거리는 질땅이란 뜻으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마을 앞에 2,000여 평 규모의 못이 있고 뒷자락 야산 두산포도농원이 있던 25~30만평 자리에는 1995년 ‘한동대학교’가 들어섰고, 남서편에는 6.25전쟁 당시 격전지였던 해발 88.3m 천마산이 있는데, 함포사격으로 산 높이가 많이 낮아졌다고 한다. 그 골짜기에는 1960년대 건설된 꽤 넓은 저수지 천마지가 자리하고 있다. 과거 이 지역 뻣재말랭이 혹은 막재말랭이라는 언덕에서 정월보름 달맞이를 했다고 한다. 시민들이 자주 찾는 양덕동 외곽 죽천리에는 간이해수욕장이 있고 횟집과 카페가 여럿인데 그 역사를 살펴보면, 한일합방 후 1914년에 봉화산(烽火山) 동남 기슭 어촌 지을(知乙)과 대벌이를 합하여 죽천(竹川)이라 하였다. 지을(知乙)은 죽천1리로 옛적에 숲과 물이 좋아 새들이 많이 서식하였기에 붙여진 지명이라 하는데, 동지달 초사흗날 동제사를 지내고 이어 용왕제를 올리고 있다. 대벌이(竹川里)는 죽천2리로 이대(箭竹, Arrow Bamboo)가 많이 자생하고 있는 여남천(汝南川)의 하구에 형성된 어촌이다. 대나무가 많은 벌에 있다고 대벌이라 부른다.
포항의 대표적 신도시인 양덕동은 사량골, 불미골, 돌골, 기낭골, 북시골, 대사말골, 대박골 등 여러 작은 골짜기의 자연부락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2000년대 들어서며 지역 주민들이 조합을 구성하여 기낭골과 갈발리 일대에 34만평 규모의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추진되어 원래의 동네 모습은 사라졌다. 사량골(思良谷)은 조선 정조 때에 최기대(崔基大)라는 진사가 이곳에서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는데 그의 호 사량(思良)을 따서 마을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불미골(冶谷)은 사량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남쪽 200여m 되는 곳에 대장간의 풀무형상과 같은 산, 그 아래에 쇠를 두들기는 쇠판 같은 언덕, 그리고 달군 쇠를 적시는 물통과 같은 작은 못이 있어서 마을 이름을 \’불미골’ 또는 ‘야곡(冶谷)\’이라고 했다고 한다. 돌골(石谷)은 불미골 동쪽 고개 넘어 있는 마을로, 뒷골에 큰 바위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갈발리(渴發理)는 옛날부터 식수가 귀하여 물이 없어 못 된다 하여 마을이름을 그렇게 불렀는데, 수십년 후 물맛 좋은 식수가 솟아나기 시작하여, 하늘에서 새로운 덕을 내린 것이라 하여 마을이름을 신덕(新德) 또는 신기(新起)라고 불렀다 한다.
대경일보 2022년 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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