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니즘의 의미

유토피아니즘의 의미

구 자 문 한동대 교수
  도시계획이론 강의 중 학생들에게 유토피아니즘에 관해 설명할 때가 있다. 유토피아는 단어 그대로 해석한다면 ‘이상향’이라고 할 수 있고, 유토피아니즘은 ‘유토피아에 갈 수 있다’ 혹은 ‘유토피아가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긍정적인 마음의 상태 내지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유토피아는 기독교에서의 천국(天國)이나 불교에서의 극락(極樂)과는 다른 차원의 개념일 수밖에 없다. 이 유토피아는 도시계획가들이 말하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를 이야기하는 것이며, 보통 정치사상가나 역사가들이 말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시각을 포함할 수도 있지만, 그 자체의 논쟁보다는 주어진 체계 하에서 인간의 가장 필요한 욕구, 즉 좀 더 범위를 좁힌 도시와 지역(Human Settlement)에서 ‘의식주’와 같은 기본적 필요(Basic Needs)를 채워주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꽤 오래전 필자도 유토피아에 대한 여러 개의 칼럼을 지역신문에 시리즈로 게재한 적이 있는데, 이는 다양한 시각의 종교적·철학적 서적들을 섭렵하고 독후감 차원에서 쓴 것들이었다. 이는 기독교적인 시각, 불교적인 시각, 혹은 일상적으로 우리가 그리는 이상향에 대한 글들이었고, 도시계획가이자 철학가인 ‘루이스 멈포드’의 글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사람의 생각이 지금 필자가 피력하는 것과 같은 스타일의 유토피아니즘과 일치한다고 생각된다. 이 사람의 정의에 의하면 유토피아니즘은 ‘우리들의 노력에 의해서 이 세상에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다’는 긍정적인 자세라고 생각된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면, 예를 들어 우리가 한 도시의 장기발전계획을 제대로 세우고 이를 이루기 위해 적극 노력한다면 20년 혹은 30년 계획이 시행되었을 때 그 사회가 유토피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비근한 예이며, 어떠한 비전적인 계획이 20~30년 만에 완성되기는 힘들므로 이를 두세 차례 반복해서라도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 유토피아니즘에 바탕을 둔 도시계획가들의 자세라고 생각하고 있다.  

  과거 사회는 현재의 복잡다단한 글로벌화된 사회에 비견하여 단순했다고 보아진다. 우리가 흔히 1차원적, 2차원적 등의 단어를 쓸 때가 있고, ‘원 디맨전’ 내지 ‘멀티 디맨전’이라는 단어들을 쓸 때도 있고, 또한 ‘블랙 앤 화이트 이슈’, ‘종합적/포용적 접근’ 등의 단어들을 대비해서 활용하기도 한다. 도시계획분야에서도 과거의 ‘물리적인 계획’이 주축을 이루었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종합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과거에는 ‘도시미화운동’이 도시계획의 큰 축이었고 도시를 아름답게 하고 대단한 건물들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었고, 이러한 것들이 우리 시민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본다. 물론 주된 흐름이 그랬다는 것이다. 이때의 유토피아는 지금 생각하면 그래도 이루기 쉬운 목표같이 보아진다. 물론 아직도 우리는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도 있지만 차차 이러한 물리적인 것들만이 아닌 경제·사회·문화적인 면들이 포함되고 좀 더 중요성을 갖는 시대에 와 있게 되었다. 우리 할머니/할아버지들이 꿈꾸던 ‘배부르고 등 따듯한’ 유토피아는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차원의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다. 이 세대에 어떠한 노력들을 기울여야 우리 사회가 그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우리 한국이 1960년대부터 큰 발전을 이룩하고 이제는 선진국의 대열에 서 있는데, 이렇게 짧은 시일 내에 가난한 개발도상국에서 이렇게 개발된 선진국으로 발전한 예가 없는 것이다. 고도의 압축성장을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 그 당시의 국가지도자를 우리는 ‘독재자’라 부르고, 그 당시를 좀 좋게 표현한다 해도 ‘개발독재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그 당시 많은 어려움, 예를 들어 성장일변도의 발전을 추진하기도 어려웠겠지만 소득분배, 정치민주화 등의 어려움들도 컸을 것인데, 이들을 다 포용하지 못하도록 노력하지 못하고 왜 독재노선을 유지 했어야 되었느냐는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나라를 발전시켰고 그렇게라도 않했다면 현재의 경제부흥과 민주사회를 이룰 수 있었겠나? 다른 동남아나 아프리카 나라들 같이 굶주리고 다툼과 내전상황을 겪고 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하에 이렇게나마 발전된 것을 천만다행으로 느끼는 국민들 또한 많을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코로내팬데믹과 경제불황으로 어려움에 처해있지만, 정치적으로도 혼돈인 듯 보여지고 있지만, 우리나라 역사에 이만한 때가 언제 있었던 가 싶게 우리나라는 이미 상승기류를 타고 잘 날아가는 듯 보인다. 우리 할머니/할아버지가 꿈꾸던 유토피아는 이미 이루어졌다고 보면 된다.

  요즈음 포용적이라는 개념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지난번에도 언급했듯이 경제발전/SOC향상 만이 아니라 문화사회적 요소들의 향상도 함께 생각하자. 주류를 이루는 그룹들만이 아니라 가난하고 대우받지 못하는 그룹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이들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하자. 혹은 생태계의 각 요소들이 서로 Win-Win 할 수 있는 사회를 조성하자는 의미라고 볼텐데, 이러한 사회가 경제성장 내지 물리적인 인프라의 바탕없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유토피아도 ‘마슬로우의 모델’에서 보듯이 ‘생리적인 충족’에서부터 ‘자아실현’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쳐 완성되는 것이라고 생각되며, 긴 시간 장기적인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유토피아니즘이란 암담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할 수 있다 등의 자신감과 끝없는 노력을 제공하는 긍정의 원천이라고 보아진다.

대경일보 2021년 1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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