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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의 유적을 보면서

구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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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의 유적을 보면서

구 자 문 한동대 교수
  고대사에 관심이 많은 필자는 전공과는 무관하게 관련 정보 열람을 일종의 취미로 삼고 있었다. 중고교 시절에도 무협지 보다는 박종화의 임진왜란, 이병주의 지리산, 나관중의 삼국지, 증선지의 십팔사략 등 일종의 역사 관련 책이나 소설들을 읽고 있었다. 전공이 건축이며 도시 및 지역계획이다 보니 고대도시와 관련된 공부도 하게 되고 역사며 고고학이 전공분야와 어느 정도는 연관을 갖는 분야가 되어 있어서 기쁘기도 하다. 요즈음은 미디어가 발달되어 신문도 인터넷을 통해 보지만, 즐기는 것은 유튜브를 통해 보는 인류학 내지 역사물들이다. 그 중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것은 한국인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가야국들이 어떻게 세워지고 흥망을 겪어갔는지, 삼국 이전에 존재하던 삼한 (마한, 진한, 변한)과 수 많은 고인돌들은 우리와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 일본은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해 갔는지 등에 관심이 많다.

  요즈음 즐겨 보는 것은 가야국에 관한 것이다. 가야는 구야, 가락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그 당시 한자 표기가 확실하게 정리되지 않은 탓에 지금까지 여러 가지로 불렸던 것이라고 한다. 가야는 서기전 1세기~서기 6세기, 경남도와 경북도 일부에서 형성된 작은 나라들의 연합이다. 근래에는 전북도 동남부와 전남도 일부까지 가야의 범주에 넣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한다. 가야는 해로 상의 요충지로서 북중국에서 한반도 남부, 나아가 일본 열도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해상 교통의 결절지였다. 가야는 그동안 우리 역사서에서 푸대접을 받았는데,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왜 기록이 남겨지지 않았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일부 신라에 흡수도 되고 멸망도 해서 그 당시 기록들이 모두 불태워졌을 수도 있고, 또한 통일신라며 고려의 역사가들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근래 가야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데, 이는 새롭게 수 많은 고분들이 김해 대성동만이 아니라 낙동강 중류 지역에서 많이 발굴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덤의 형태 때문에 도굴꾼들이 부장품들을 발견하지 못한 탓에, 예를 들어 낙동강 중류지역의 12개 고분에서 2,000점의 많은 부장품들이 발견된 것이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으로 대표되는 3세기 후반 이후의 유적에서는, 길이 8m 정도의 대형 덧널무덤이 설치되기 시작하였고, 유물로 청동솥, 쇠로 만든 갑옷과 투구, 기승용 마구 등 북방 문화 요소를 부장하였다. 이러한 유물유적 상황은, 유적 입지 조건이나 부장 유물의 수준으로 보아 정치적 지배 계급의 성장에 따른 좀 더 강한 국가체게의 출현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이외 가야지역에도 거의 모든 시군의 야산마다 5~6세기의 고분군들이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다.  

  가야의 힘은 철 생산 능력의 우월성에 있었다. 가야는 일찍부터 풍부한 철광산을 소유하고 있었고, 이를 개발하여 철을 팔아 낙랑이나 백제의 선진 문물을 구해올 수 있었다. 또한 왜 보다 철 소재 자원이나 철기제작 기술면에서 우위를 가지고 있어서 그들을 어느 정도 조종할 수 있었다. 왜는 3∼5세기까지 대부분 철 소재를 가야에서 얻어 쓰고 있었다. 고분에서 가야국 생산의 창만이 아니라 왜의 창들이 발견되어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이는 고구려와 신라의 침략에 맞서 군사를 동원하는데, 철제무기나 갑주 등이 우수했음에도 인구가 적어 여성전사들까지 동원해야 했고, 일부 왜의 군사들을 빌려 용병으로 활용했다고 설명되고 있다. 그만큼 정세가 급박했다는 것이다. 가야국들은 김해, 함안, 고령 등에 자리잡은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등은 타 지역에 비해 입지조건도 좋고 문화능력도 우월하여, 한 나라가 결정적으로 탁월해지는 것을 서로 견제하기도 하였기에, 우수 인재들이 등용되기도 했지만 통합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했음이 약점이었다.  

  일부 학자들의 견해를 빌리면 가야는 고조선과 예맥의 자손들이 백제를 거쳐 가야에 도달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가덕도 고인돌 유적에서는 북방 백인계통 유골들이 대량으로 발견되고, 대성동 고분군에서 발견된 여성전사들은 북방계가 아닌 남방계 일본 조몬인 계통이라는 것이다. 또한 2004년 서울대팀이 김해 예안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왕족으로 추정되는 유골 4구의 미토콘드리아 분석 검사를 진행했는데, 그 가운데 1구가 남인도 드라비다계 DNA와 80% 이상 일치한다는 것이다. 물론 수로왕의 부인이 북인도에서 온 허황후라고 하니 남방계가 당연히 섞여 있을 것이라고 생각들을 하지만, 이 유골은 북인도계가 아닌 남인도 드라비다계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도 유골 4구 가운데 1구에서 이 같은 결과를 얻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가야가 북방계 고조선 및 예맥족 자손들이 주력이라고 할 수 있지만, 또한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 사는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일부는 신라의 김(金)씨 귀족이 되고, 일부는 후에 멸망한 백제인들처럼 적지 않게 일본으로 건너갔을 것으로 보며, 일부는 구(具)씨 처럼 집안과 성씨를 약간씩 바꾸어가면서 한반도에 살아남았을 것이다. 선대의 역사라는 것은 승자의 입장에서 써지는 것이고 당연히 많은 각색이 있을 수밖에 없다. 고분군에서 발견되는 유물들도 그 당시의 아주 작은 단편만을 보여주는 것이니, 모든 게 퍼즐 맞추기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서며 고분의 유물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인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많은 학자들이 수십백년에 걸쳐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연구를 해 나가는 것이다.

영남경제 2024년 5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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