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새해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서
구 자 문 한동대 교수
필자가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 처음 와본 것이 1985년이니 거의 40년 동안 그 변화를 지켜 본 셈이다. 그중 4년은 박사학위 취득에 매진했고, 6년은 관련분야 직장에서 일을 했고, 그후 한국으로 귀국을 했지만 매 방학 때마다 1년에 두차례씩 3~4주씩 방문했으니 로스앤젤레스 및 인근지역들은 물론이고 코리아타운의 이모저모를 비교적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로스앤젤레스 지역에 한국인들이 첫발을 디딘 것은 역사기록에 나와 있는 것처럼 20세기초 하와이 애니깽 농장으로 이민을 했던 한국인들이 1910~20년 즈음 하와이를 떠나 인근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때 ‘안창호’ 선생도 이곳에 머무르고 계셨다고 생각된다.
이때 일부 한국인들은 로스앤젤레스 벙커 힐 다운타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이때는 인종차별 법으로 인해 한국인들의 주거도 일부 저소득 지역으로 제한되었다. 1930년대에 한국인들은 버몬트 애비뉴와 제퍼슨 블바드 인근으로 이사하기 시작했다. 그후 기록들이 많지는 않지만 지금은 돌아가신지 20여년이 흐른 베렌도침례교회 안이숙 사모님의 전기, ‘죽으면 죽으리라’에서 1940년대 후반의 코리아타운의 모습이 잠시 그려진다. 1950~60년대만 해도 UCLA, USC 등에 유학온 학생들과 가족들 이외에는 한국인이 거의 없었다고 보면 된다. 아 그리고, 필자가 로스앤젤레스 시정부에서 일할 때 이미 연세가 70이 되신 이승하 목사님이 데이터 분석관으로 근무하셨다. 이분과 대화도 하고, 이분 전기도 읽었는데, 1940년 후반부터 1950년대 초반에 이르는 북한과 서울의 모습, 그리고 무일푼 유학왔던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의 코리아타운이 잠시 그려지기도 했다.
이때 로스앤젤레스 남부에서 흑인계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중산층 백인 들이 중부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올림픽대로 북쪽 인근지역은 아시아 거주민의 주거지로 바뀌어 갔는데, 이 지역이 한인 커뮤니티의 주류가 되었고 코리아타운이 되었다. 그때는 한국인들이 유학을 오거나 이민시 돈을 가져오지 못해서 대부분 무일푼으로 식당에서든 마트에서든 일해야 했고, 영어도 잘못하는데, 아시아인 그것도 가난한 한국인이라고 무시를 받았었다. 1970~1980년대가 되며 이민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유학생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 올림픽대로와 8번가 지역 대부분 기업들은 한국인들이 소유하게 되었다. 이 경제호황은 한국계 언론 매체와 지역사회단체의 창설로 이어졌으며, 이 단체들은 한인 커뮤니티 공동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1982년에 첫 번째 코리아타운 사인을 설치하기 위해 성공적으로 로비를 했으며, 차차 남가주의 한인들의 중심허브로 자리잡게 되었다.
필자가 1985년 로스앤젤리스에 왔을 때는 이미 코리아타운이 크게 형성되어 있었다. 동서로는 올림픽과 윌셔, 남북으로는 벌몬트에서 웨스턴에 이르는 코리아타운이 남북으로 동서로 뻗어나가고 있을 즈음이었다. 그 당시 몇 년 코리아타운 올림픽과 노르만디 인근에 살았는데, 지금과 비교하면 큰 건물들이 좀 적을 뿐 많은 가게와 음식점들이 몰려 서울의 한 모습 같이 보이기도 했었다. 그때 특징적으로 보이던 가게가 ‘김방아’였는데, 그 주인은 환갑넘어 이민을 와 90세에도 정정하게 가게를 운영한다는 분이었다. 그때도 ‘김스전기’가 활발히 장사를 하고 있었고, 자주 가던 중국집 ‘신북경’, 잘 아는 분이 운영하던 ‘백보한의원’, 전자제품가게 ‘헐리트론’ 등이 있었다. 코리아타운의 상징인 대형 몰인 ‘코리아타운 플라자’는 1988년에 준공되었다.
1992년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에서 ‘로드니 킹 재판 결과’에 대한 불만으로 흑인들을 중심으로 폭동이 일어나고 폭도들이 인근 가게들을 휩쓸고 코리아타운까지 침범했었다. 당시 경찰들은 북쪽 부유한 지역 방어를 위해 그곳에 바리케이트를 쳤고, 한인타운은 폭동에 무방비로 놓여졌었다. 이때 한인들은 가게를 지키기 위해 무장하고 나섰고, 잘 지켜 냈는데, 이는 ‘지붕 위의 한국인’이라는 기사와 함께 잘 알려졌었다. 마지막 날쯤 한인들 3만명이 모여 평화를 위한 퍼레이드를 벌이기도 했었다. 일주일 동안의 폭동은 다운타운 및 코리아타운의 많은 부분을 파괴했다. 미디어에 따르면 그 폭동으로 5,000만 달러 상당의 피해가 있었고 그 중 절반은 한국 소유 기업의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보험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은행거래도 제대로 않는 경우가 많던 한인 상인들은 피해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 당시 로스앤젤레스시 주택경제분석관이었던 필자도 폭동 후 미국인 동료들과 파괴된 지역을 돌아보았는데, 주로 한인 편의점이나 리커스토어가 파괴됨을 보았다. 갱단본부들이 있는 곳으로도 가 보았는데, 건물 앞에 연발장총을 들고 지키는 갱들도 여럿 보였다.
그러며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우리 한국의 발전에 따라 코리아타운도 큰 투자가 많아져 큰 건물들이 세워지고 좀 더 많은 큰 기업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1980~90년대에 자녀교육을 위해 다아몬드바 등 교외로 집을 사서 이사갔던 한인 1세들이 다시 한인 가게, 병원, 교회 등이 많은 코리아타운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팬데믹으로 그리고 이어진 러-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국내외적 어려움하에 있지만 코리아타운은 이를 극복해가며 건재하고 있으니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2024년에도 우리 한국인 그리고 동포들 기쁨 넘치는 한해 되소서… Happy New Year!
대경일보 2023년 12월 31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