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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강의 역사문화 탐방

구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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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강의 역사문화 탐방

구 자 문 한동대 교수
  며칠 전 인근 흥해읍 중심지에서 점심을 먹었다. 흥해는 오랜 역사를 지닌 소읍으로 신라초기에는 퇴화군(退火郡)으로 불리다가 고려초기에 흥해군(興海郡)으로 바뀌면서 명칭이 나타났다. 필자의 직장과 그리 멀지 않기에 가끔 나가서 김치찌개, 갈치조림 등으로 점심을 먹고는 한다. 이날은 지인 한분이 얼마전 이곳에 수제버거 가게인 ‘스웩버거’를 내었기에 동료 둘과 들리게 된 것이다. 정성들인 수제버거, 아보카도 샌드위치, 후렌치 후라이, 그리고 커피 한잔 씩하고 직장으로 돌아오는데, 이번에는 오랫만에 흥해들로 난 옛길을 타고 가기로 했다. 이 길은 고속도로가 나기 전 필자가 십년 가까이 통근하던 좁은 길로서 넓은 흥해들을 지나게 되어 있다. 그리고 하천 위로 난 꽤 큰 다리인 남송교를 건너게 되는데, 이곳에 일부러 내린 적은 없어도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맑으나 흐리나 비가 오나 바람 부나 한편의 그림같이 느끼던 곳이다. 들을 지나 다리를 건너자마자 조그마한 동산과 조금 더 높은 산들이 연결되는데 큰 키 송림이 우거지고 가장자리에는 대나무숲이 있다.    

  그런데 동행한 연구원이 이곳에 자기네 시조묘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같이 올라가 보기로 했다. 언덕바지로 4륜구동을 몰고 갈만한 길이 나있는데, 막상 올라가니 넓은 평지이며 한쪽에 흥해평야를 내다보며 큰 무덤이 있는데, 그 크기가 웬만한 왕릉만했다. 원래는 봉분이 더 거대했는데, 근래에 관리 편리상 규모를 축소한 것이라고 했다. 신라의 왕릉들보다 규모는 좀 작지만 그 앞에 석상들이 몇 개 도열해 있다. 이 무덤의 주인은 고려시대 장군으로서 곡강부원군이라는 시호를 받은 분이다. 물론 곡강최씨와 흥해최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이분이 대단한 인물이기도 하고 이곳 곡강과 인연이 있어서 이곳 이름을 따 벼슬을 받고 자손들이 이곳에 거주했던 것이다.

  이곳에서 흥해들이 내다 보인다. 이 자리가 풍수지리적으로도 전국에서 손꼽히는 명당이라고 했다. 곡강((曲江)이라는 지명은 신라 초기부터 존재하던 마을 이름이었는데, 지금도 곡강리로 남아있다. 이 지역은 문화탐방지역으로도 지정되어 있는데, 그 뒤로는 큰 돌들이 줄지어 놓여 있고 좀 더 뒤쪽 산길을 따라가니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있다. 사실 이 지역은 원시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고 고인돌과 암석화를 많이 남겨 놓았는데, 많이 훼손되고 몇 개만 남아있다고 보아진다. 이 고인돌은 그 크기가 매우 크고 무거워 훼손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진다. 여기서 산길을 따라가니 이 문중 서원인 곡강서원이 나타난다.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규모도 크고 잘 지어진 건물 같아 진작 와 보지 못한 것이 좀 아쉬웠다. 사실 포항을 포함한 동해안 일대에는 이러한 묘소와 서원들이 적잖이 남아 있다. 또한 경주 강동의 ‘양동마을’, 영덕 영해의 ‘괴시리마을’ 등 명문가의 마을들도 여럿 남아 있다.

  이 곡강 인근의 평야를 포함한 흥해들이 동해안에서는 매우 드문 넓은 곳이라서 이곳 사람들이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진해적 및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곳이라서 생각만큼 그러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 집안의 경우도 시조 이후 대가 끊어진 듯 몇 백년 기록이 없었다. 물론 자손들이 집안 소유의 재산을 지키며 살아오고 있었다고 보지만, 그 당시는 족보가 제대로 기록되지 않으면 몇 대 지나며 잘 알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전란 등을 통해서 그럴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고, 한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아 그리 되었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세월이 지난 후 다시 중시조를 통해 집안의 명맥이 이어져 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여러 계통의 집안이 생기게 되기도 하고 정통시비가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우리 역사에서 흔한 편이다. 필자의 집안도 시조가 고려개국공신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한 200년 후 중시조로부터 역사가 다시 기록되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많은 해석이 존재하고 있다. 곡강의 이 집안의 경우도 마찮가지의 세월을 겪어 왔다고 보면 된다. 현재 이 집안의 인구가 수천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 지역에서의 집안의 명성이나 재산 등으로 볼 때 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했다. 하지만 외적의 침입, 수도권에서 먼 지역인 이곳의 사정을 생각해 볼 때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물론 지금 족보에 나타난 분들은 일부이고 또한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근대화시기 여러 이유로 다른 일파로 옮겨 갔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주요 성씨를 이룬 집안의 성씨들은 본관도 파도 많은데 한 본관의 인구가 수백만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한반도에서 살아온 1,000~2,000년의 세월 동안 겨우 대를 이어올 만큼 사망률이 높고 짧은 평균수명을 생각하고, 더구나 인구증가는 지난 100년간에 걸쳐 일어난 것임을 생각할 때 수백만 인구형성이 불가능하다는 학자들이 있기도 한 것이다. 우리가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 당시로 날아가 볼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고, 기록을 바탕으로, 그리고 남겨진 흔적이나 예전의 상황을 감안하는 등 여러 논리적인 추정을 통해서 역사를 구성해 나가는 것이다. 물론 DNA분석을 통해 우리 민족의 유래를 파악하려는 학자들이 있는 것처럼, 한 집안의 역사도 이를 통해 파악하려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나, 이에 대한 필요성이나 호불호가 크게 다를 수 있어 일반화하기는 힘들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 민족은 집안을 중시하고 족보를 중시하는데, 이는 21세기에 드문 현상이면서도 자랑이기도 한 것이다. 아무쪼록 이 묘소와 서원이 잘 보전되고, 주변도 어울리게 개발되어서, 이곳이 많은 이들이 다녀가는 역사문화명소가 되고 이 집안의 자랑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영남경제 2022년 9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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