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대학교 교수 구 자 문
1992년 4월 29일 발생한 LA폭동 20주년이 며칠 전 지나갔다. 이 사건은 흑인청년 ‘로드니 킹’을 집단 구타했던 4명의 백인경찰관이 무죄판결을 받은 데 대해 LA의 흑인들이 반발하며 6일간 벌인 폭동이었으며, 한인사회의 피해가 매우 컸었다.
1991년 3월 3일 한 흑인청년이 과속으로 차를 몰다 경찰에 잡히고 집단구타를 당해 큰 부상을 입었는데, 그 폭행장면이 한 주민에 의해 녹화되고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게 되며 큰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그러나 구타하던 경찰들에 대한 재판이 무죄로 판결됨에 따라, 도심지역에서 일부 흑인들이 경찰차에 돌을 던지는 등 불만표출들이 오후 늦게부터는 대규모 폭동으로 번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주변의 상가들을 때려 부수고, 불 지르고, 약탈을 단행했다. 이때 이 흑인지역에 중소규모 마켓 등 사업체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 한인들이라서 당장 그 피해의 대상이 되었다.
폭도로 변한 데모대들은 무장을 하고 차에 탄채 북쪽에 위치한 드넓은 한인타운을 휩쓸고 다녔고, 이때 재산과 인명에 많은 피해가 났다. 이들의 목적지는 한인타운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백인들이 운집한 베벌리힐스 등이 있는 서부 로스앤젤리스 지역이라고 보아지는데, 넋을 놓고 있던 경찰과 주방위군들이 그 지역입구에만 집중방어망을 쌓게 되어 폭동의 피해는 고스란히 도심상가지역과 한인타운에 집중되었다.
로스앤젤리스 주택국에 근무하던 필자도 4월 30일부터 업무상 주택국 관할 사업지역을 돌아봐야 했는데, 지속되는 폭동 속에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앞좌석에 한국인인 필자와 백인여성, 뒷좌석에 동료직원인 백인남자가 타고 있었는데, 로스앤젤리스시청 로고가 크게 찍혀있는 차에 ‘타겟그룹인 백인과 한국인’이라며 많은 이들이 염려했었다.
그 당시 2,800여개에 이르는 한인업소들이 파괴되고, 불타고, 약탈되었다. 한인타운의 일부 가게주인들이 한인청년들과 권총이나 장총을 들고 밤새도록 폭도들과 싸우며 재산을 지키고 있었으며, 이때 총상으로 숨진 이들도 있었다.
한인타운과 교포들은 이 폭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타격을 입게 되었다. 10억 달러에 이르는 전체피해의 절반 이상이 우리 교포들의 재산이었고, 정부도 매스컴도 보호해주지 않던 비주류로서의 억울함도 컸었다. 정부의 복구지원이 대단했지만, 우리 교포들은 세금보고 및 건축법 등에 서툴렀던 관계로 보상금도 제대로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 폭동의 영향은 매우 커서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인기 좋던 ‘부시’가 패하게 되고 전혀 예상치 못하던 젊은 ‘클리턴’이 당선되었다. 우리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정치력을 키워야 한다는 자각이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LA폭동 20주년을 맞으며 미주한인회와 교계에서 성명을 내놓고 있다. 이들은 “재미동포 사회가 민족적 자만에 빠져 타민족을 경시하는 풍조가 늘어가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작은 실천을 통해 이웃 타민족들과 아픔을 같이하는 친구가 되고, 그들의 커뮤니티에서 봉사하고 연대하는 일을 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맞는 말이라고 본다. 하지만 좀 아쉬운 것은 그 당시 다른 민족 커뮤니티의 리더 목사들 같이 ‘우리의 권리가 침해 되었다’, ‘피해 보상을 해 달라’ 외치는 한인지도자들은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모든 것이 불타버린 비참한 가운데 절망에 차있던 우리 동포들 앞에서 했던 그 말들을 20년 지난 지금도 반복함은, ‘분명 옳은 말’이면서도 한편 서운함이 느껴지는데, 이는 필자만의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울산매일 2012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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